뜨거운 햇빛이 벽을 누렇게 물들이고 있었다. 바람이 약한 계절이지만 여전히 모래 먼지가 풀풀 날리는 것 같았다. 카이로 시내 한 복판의 광장은 그런 먼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삐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고, 광장을 끼고 있는 영국군 사령부 건물은 그 먼지를 막기 위해 창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발렌타인은 목깃을 느슨히 하며 카페테리아로 들어섰다. 카페테리아 안은 이런 날씨를 견디지 못해 들어온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하지만 장교전용답게 다른 곳 보다 배로 넓고 시원했고, 음료 바뿐만 아니라 카드 테이블과 당구대도 갖춰져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동료 장교들을 놀려먹으며 포커를 치거나 당구공을 굴렸겠지만, 어쩐지 지치는 기분이라 발렌타인은 곧장 웨이터에게 직행했다.
“레모네이드. 시원하게. 지이이인짜 시원하게.”
일반 사병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발렌타인 중위가 걸어오자 잠깐 긴장했던 웨이터는 곧 웃으며 레몬을 꺼냈다. 커다란 유리잔 가득 채워진 얼음이 기분 좋게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냈다. 바깥의 뜨거운 공기를 만난 냉기가 잔 표면에 송글송글 맺혔다. 발렌타인은 레모네이드를 받아들어 한 모금 맛을 보았다.
“괜찮네.”
서글서글한 웃음을 흘리고 다니지만 은근히 까다로운 이 중위의 입에서 칭찬이 나오자 웨이터가 안도의 한숨을 짧게 쉬었다. 발렌타인은 잔을 들고 테라스로 향했다. 바닥까지 이어진 커다란 격자 창문을 열어젖히자 여기저기서 불평과 야유가 터져 나왔다. 궁시렁거리는 동료들에게 윙크를 한 번 던져준 발렌타인은 야외 테라스로 나와 창문을 닫았다. 바깥의 후덥지근한 공기에 잠시 망설였지만 곧 적당한 그늘에 놓인 테이블을 발견하고는 발을 옮겼다. 철제 의자는 적당히 따끈했기 때문에 발렌타인은 큰 불평 없이 의자에 앉았다. 모래바람 때문에 다들 건물 안에만 박혀 있어서인지, 불행하게 순찰 당번이 된 몇몇 병사들을 제외하고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았다. 발렌타인은 느긋하게 몸을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얼굴에 와 부딪히는 바람이 서걱거렸다. 이집트인들은 사막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당나귀의 숨결이라고 부른다. 당나귀 머리를 한 악신 세트가 열병과 온갖 나쁜 것들을 실어서 보내는 불길한 바람이다. 바람을 맞으며 반쯤 누워 있는 발렌타인의 귀에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발렌타인.”
아니나 다를까, 불길한 것이 왔다. 또 잔소리다.
“중위를 붙여 주세요, 로우 위 소령님.”
한쪽 눈만 슬그머니 뜨니 얼마 전 승진한 친구의 얼굴이 보였다. 로우 위가 얼굴을 찌푸리고 서 있었다. 발렌타인은 그 자세 그대로 손만 들어 올렸다. 로우 위는 혀를 한 번 차고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땀은 거의 흘리지 않았다. 그늘 안에서 얼굴이 하얗게 떠 보였다.
“장교답게 품위를 지키도록 하게. 그리고 소령님이라고 부르지 마.”
“말의 앞뒤가 안 맞는 거 알아?”
발렌타인은 키들거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손을 뻗어 반대편 의자를 가리켜보았지만 로우 위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미지근한 의자가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발렌타인은 깊게 따지고 들지 않았다. 로우 위는 발렌타인보다 키가 약간 작았기 때문에, 발렌타인은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위치에서 로우 위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로우 위는 장갑을 매만지며 말했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로우 위는 완벽하게 군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네가 그렇게 부르면 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어차피 저 쪽에는 말소리도 잘 들리지 않을 테니 호칭 정도야 아무렴 어떤가.”
로우 위가 뒤쪽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사병 몇이 잔뜩 긴장해서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겁을 먹은 표정이다. 발렌타인은 피식 웃었다.
“넌 가끔 보면 진짜 막 나가는 거 같아.”
“이런 정도로 너한테 막나간다는 이야기를 듣다니 세상 말세로군.”
“아냐, 이것뿐만 아니라 많아.”
“언제.”
“음, 침대 위에서?”
로우 위가 주먹을 들어올렸다가 멈칫했다. 머리로 주먹이 날아올까 싶어서 잠시 움찔했던 발렌타인이 빙글빙글 웃었다. 혹시 싶었지만 역시나 때리지 않는다.
“밖에서 그런 소리 함부로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어차피 저쪽에 안 들린다며?”
“만에 하나라도 듣는 귀가 있으면 곤란해지지 않나. 오랜 친구라서 서로 이름 부르는 정도랑은 비교도 안 될 문제야.”
눈썹을 찌푸리는 로우 위를 보면서 발렌타인은 속으로 작게 웃었다. 그런 스캔들이 난다면 곤란해지는 건 발렌타인 쪽일 것이다. 걱정해 주는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로우 위는 항상 이런 식으로 신경을 썼다. 어릴 때부터 들어와 익숙하게 느껴지는 잔소리가 그립기까지 했다.
“네, 네, 조심하겠습니다.”
발렌타인이 장난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리자 로우 위는 얕게 한숨을 쉬었다. 어느새 해가 기울어지고 있었고 나무는 그림자를 길게 뿌렸다. 아까까지 그늘이었던 발렌타인의 등 언저리까지 햇빛이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로우 위가 몸을 돌렸다.
“편히 쉬는 건 좋지만 너무 방만한 모습을 보이지는 마. 넌 안 그래도 유명인사라 주목의 대상이니까.”
발렌타인은 로우 위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로우 위.”
“왜.”
“또 보자.”
“...그래.”
모래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로우 위가 떠나가는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발렌타인은 탁자에 엎드렸다. 얼굴 옆에는 이미 미지근해진 레모네이드가 놓여 있었다. 일 년 내내 뜨거운 사막의 기후는 날짜 감각을 앗아간다. 아, 오늘이 할로윈이었구나. 창백하고 서늘한 얼굴이 떠올랐다. 발렌타인은 3개월 전 까지만 해도 중위였던 로우 위의 모습을 기억해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마지막으로 눈에 남은 모습은 2계급 특진 후, 소령 예복을 차려입고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었다. 손목만큼이나 하얗던 장갑. 이번에도 손을 잡아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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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메이커 연성 키워드 [테이큰의 키워드는 따뜻한 오후, 사막, 파이팅!, 일상 입니다! 잘 엮어서 연성해보세요! 파이팅!/http://t.co/4yDvJil] 를 보고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