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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타인+로우 위
커플링 요소는 없습니다. 없.....다고 생각합니다ㅎ
코를 찌르는 듯 한 커피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발렌타인은 입술을 씰룩거렸다. 마로 된 포대, 축축한 커피체리, 비닐 끈, 불쏘시개로 던져 넣은 장작이 한꺼번에 뒤엉켜 타는 연기는 매캐했다. 그 때 브라질에서는 매일같이 해변에서 커피 볶는 향기가 풍겨왔다고 들었지만 발렌타인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매운 연기 아래로 커피 냄새를 잡아 낼 수 있었지만 더 이상 기분 좋은 향기가 아니었다. 어쩌면 저것도 큰 사이즈의 로스팅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발렌타인은 멍하니 소각로에서 치솟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40톤 분량의 커피체리가 자루채로 타고 있었다.
“아깝긴 하네.”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돼. 공급이 과하면 결국 그 상품의 가격은 폭락하게 되어 있어. 산지폐기는 시장에 출하되는 농산물 물량을 줄여 가격을 회복시키기에 효과적인 자구책이야. 당장 눈앞의 커피 몇 만 톤을 남겨두기 위해서 커피 전체의 가치를 떨어트릴 수는 없어.”
별 생각 없이 툭 내뱉은 말에 진지한 대답이 돌아왔다. 발렌타인은 눈만 굴려서 옆을 힐끔 바라보았다. 발렌타인보다 한 걸음정도 더 앞에 나와 있는 로우 위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차분했다. 로우 위가 발렌타인에게 설득 종료를 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 말은, 대화 상대보다는 말 하는 자기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해 소비되기도 한다. 발렌타인은 로우 위 대신 협회에 화를 내 줄까 생각했지만, 그 쪽이 더 실례라고 생각하고는 그만두었다. 대신 자신이 해도 되는 말을 꺼냈다.
“로우 위, 커피 한 잔 내려줘.”
소각로에 처음 불이 붙은 이후로 40분 정도 미동도 없이 서 있던 로우 위가 처음으로 몸을 돌렸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지만, 눈썹에 힘이 풀려있다.
“하긴 며칠 동안 커피는 입에도 못 댔네. 마시러 가자.”
2003년, 커피농가의 악몽이 가장 황홀한 형태로 구현되었다. 연이은 3년간의 유래 없는 풍작이었다. 시야를 가득 붉게 물들인 커피 체리를 보면서 농민들은 절망했다. 시장에 상품이 너무 많이 풀린다면, 가격은 필연적으로 떨어 질 수밖에 없다. 커피 값은 백여 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다. 처음 2년간 커피가격은 경제의 자연 순환에 맡겨두자는 입장을 취했던 가장 온건한 간부조차도 무언가 행동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가장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은 공급을 줄이는 것이다. 공급과 수요가 적정선을 유지한다면 커피가격도 자연스럽게 회복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수확이 끝난 커피를 폐기하는 방법이 문제였다. 신의 비밀결사의 위광은 여전히 무시 못 할 것이었지만, 세계는 더 넓어졌고 지켜보는 힘 있는 눈들이 많았다. 30년대 브라질 정부가 했던 것처럼 농가 전체를 폭력적으로 장악 할 수는 없다. 가급적이면 세계커피협회 산하의 조합에 소속되지 않은 농가가 자발적으로 커피 판매를 포기해 주는 평화적인 해결이 필요했다.
그래서 로우 위는 콜롬비아로 파견되었다.
세계커피협회에 완전히 흡수된 많은 나라들과는 달리, 콜롬비아는 품질 면에서 세계 1위를 고수한다는 자부심으로 뭉친 독자적인 커피생산자 협회가 힘을 갖고 있는 나라였다. 농장의 주인들은 세계커피협회에서 파견 나온 새파란 애송이들을 기꺼워하지 않았다. 로우 위와 발렌타인은 커피 한 잔은커녕 의자도 제대로 권하지 않는 냉랭한 분위기의 응접실을 몇 백 군데나 들렀다. 오래 서 있을 필요는 없었다. 설득은 짧고 간결하게 이루어졌다. 면담을 요청하는 책임자뿐만 아니라 그 호위로 파견된 회원 역시 십대후반의 애송이라는 것에 방심하고 마음의 빗장을 느슨하게 한 탓일 지도 모른다. 발렌타인은 로우 위가 이것까지 생각하고 백업으로 자신을 요청 한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일지 궁금해졌다.
농가 방문은 순조로웠고 발렌타인과 로우 위는 안데스 산맥 기슭을 따라 발자국을 찍었다. 로우 위가 들렸다 간 농장에는 불길이 치솟았다. 발렌타인은 지도에 꽃으로 된 길이 피어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날은 콜롬비아에서 보내게 될 마지막 밤이었다. 산 아래에 따로 숙소를 잡았다가 새벽에 다시 헬기를 타기 위해 산을 올라오는 대신 로우 위와 발렌타인은 농장의 방 한 곳을 빌리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농장에서 로우 위는 어렵지 않게 주인을 설득했다. 오전 내내 농장 일꾼들이 짊어지고 나른 커피자루는 다시 소각로에 차례차례 던져졌다. 로우 위는 볕이 좋은 마당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 모습을 구경했고, 소각로에 불을 붙일 때는 그 바로 옆으로 아예 자리를 옮겼다. 수만 톤의 커피를 태워버리게 만들었지만 둘 다 그 모습을 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발렌타인은 한 걸음 떨어진 뒤에서 로우 위를 바라보며 섰다. 하지만 로우 위는 시종일관 차분했고, 로우 위가 뭔가 반응을 보이기 전에 먼저 두통을 느낀 발렌타인은 어쩐지 졌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로우 위도 불타는 커피를 끝까지 바라볼 생각은 없었던지, 발렌타인이 말을 걸자 별다른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농가 주방을 빌려 로우 위는 커피를 내렸다. 콜롬비아가 자랑하는 수프레모의 향이 주방을 가득 채웠다.
“올해는 이제 이걸 거의 못 마시겠네.”
“커피를 폐기한 농가는 콜롬비아 전체를 봤을 때 아주 일부뿐이야. 당장 커피를 사는 사람들은 크게 달라진 것을 느끼지 못할 거야.”
로우 위의 목소리가 잔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에 섞여서 들렸다. 창을 옆에 끼고 테이블에 앉아있던 발렌타인은 카운터로 시선을 옮겼다. 로우 위의 등이 보였다. 로우 위는 커피 잔을 들고 몸을 돌렸다.
“그래도 산지 농장에서 이렇게 마실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으니까…, 즐길 수 있을 때 커피를 즐기는 것도 좋겠지.”
물을 끓인 탓에 약간 축축해진 공기가 창문에 들러붙었다. 멋스럽게 낡은 창틀에 끼워진 유리가 뿌옇게 흐려졌다. 발렌타인은 손을 뻗어 유리에 의미 없는 낙서를 했다. 손끝을 타고 유리의 매끄러움이 느껴졌다. 한층 더 연해진 햇볕이 유리 너머로 쏟아졌다. 따뜻하게 춤추는 공기 안에서 작은 먼지들이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이미 커피 솜씨로는 협회의 그 누구도 따를 자가 없는 로우 위가 내린 커피답게, 커피는 맛도 온도도 근사했다. 거짓말처럼 완벽한 시간이다.
오랜만에 갖는 제대로 된 휴식에 발렌타인은 겨우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지난 몇 달간 로우 위와 계속 함께 있었지만 둘이 얼굴을 마주할 시간은 오히려 평소보다 더 적었다. 발렌타인은 농장을 방문하며 주인과 대화하는 로우 위의 등을 보고 멀거니 서 있거나 주변 경관을 구경하는 척 하며 농장 일꾼들의 동태를 살폈다. 이동 시간에는 한 쪽이 조수석에서 쪽잠을 자는 동안 다른 한 쪽이 운전을 했다. 농장 방문 루트를 결정하는 것 외에는 특별한 계획이나 작전은 필요 없었고, 로우 위가 따로 설명을 해 주지도 않았다.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로우 위와 달리 발렌타인은 딱히 사고 할 일이 없었고, 그 남는 기력을 로우 위를 관찰 하는 데 사용했다. 등 뒤에서 말없이 내려꽂히는 시선을 로우 위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우 위는 발렌타인과 거의 대화가 없다는 것에 답답해하지도, 지치지도 않은 것 같았다. 간만의 휴식을 완벽하게 구상해 놓고도 아무런 감흥이 없어보였다. 그래서 발렌타인은 로우 위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로우 위는 발렌타인 맞은편에 앉아 창으로 쏟아지는 햇볕을 받고 있었다. 햇빛 아래로 잘 나가지 않는 로우 위가 저렇게 해바라기를 하는 광경은 식물의 광합성을 떠올리게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빛을 받고 있는 마른 나뭇가지. 알비노인 로우 위는 회원의 힘을 각성하고 신체능력도 향상되기 전 까지는 햇볕이 드는 자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늘을 찾는 습관은 지금도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로우 위가 햇빛 아래로 나가는 것은 그렇게 의식하고 의도했을 때뿐이었다. 발렌타인은 로우 위가 어떨 때 햇빛을 받는지 궁금했다.
로우 위가 별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조용했기 때문에, 발렌타인도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조금 진한 흑설탕의 단맛이 올라왔다. 로우 위가 호흡하는 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주방 안에는 커피가 목을 넘어가는 소리와 커피 잔이 달칵 거리는 소리뿐이었다. 산속의 밤은 빠르게 찾아왔고 조금 전 까지 주황색이었던 하늘이 거짓말처럼 까맣게 먹혔다. 커피를 다 마신 발렌타인과 로우 위는 농장 주인이 내어준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 더블 베드?”
“제일 깨끗한 방이라는군. 일꾼들 숙소 때문에 손님용 방이 거의 없거나 청소가 제대로 안 되어 있다던데.”
어차피 어릴 때는 천둥치는 날 발렌타인이 로우 위의 침대로 기어들어가기도 했고, 임무 수행을 위해 좁은 텐트 안에서 침낭 하나로 둘이 버틴 적도 있었다. 새삼 쑥스럽거나 열없음을 느낄 사이도 아니다. 하지만 발렌타인은 넓은 침대를 덮고 있는 촌스러운 페이즐리 무늬의 이불을 보면서 낭패감을 느꼈다. 좀 좁고 더러운 방에서 자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밤은 로우 위에게 독방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농장 주인과 교섭을 한 것은 로우 위이고, 지금 와서 방을 하나 더 달라고 한다면 로우 위가 먼저 이상함을 느낄 것이다. 발렌타인에게는 지금 이 평온한 공기를 깰 용기도 없었다. 결국 간단하게 샤워를 마친 발렌타인은 침대로 올라갔다.
“몇 달 간의 고생도 오늘로서 마지막이군. 수고했어.”
로우 위가 말했다. 푹신한 베개에 머리가 가라앉아 목소리가 약간 울렸다. 발렌타인은 엔드테이블에 있던 스탠드를 껐다. 갑작스러운 어둠에 익숙해지지 못한 눈앞이 완전히 깜깜해졌다. 옆에서 로우 위가 몸을 뒤척이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일 하루 종일 비행기를 타려면 피곤할 거야. 잘 자.”
낮게 깔린,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로우 위의 목소리는 언제나 차분했다. 발성 연습이라도 따로 하고 있는 걸까. 언성을 높이지도, 강압적인 말투를 쓰지도 않았지만 로우 위의 목소리는 언제나 귀에 잘 들어왔고 거절 할 수 없는 울림을 갖고 있었다. 그 때도 로우 위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은 언제나 위대하고 거룩하신 분이죠, 만델린. 당신이 무리해서 충성을 바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입니다.”
“나는 C. 만델린이다, 꼬마야.”
“회원 C. 만델린은 순교하게 될 겁니다.”
회원은 모두 신의 힘을 나누어 받았지만 그것을 특정한 능력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개인의 역량이다. 중력을 무시하는 것, 무엇이든 둘로 가르는 것, 십 분이라는 시간을 완전히 잘라내는 것. 이러한 능력은 그 소유주가 그것이 가능 할 거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믿을 때 비로소 발동된다. 일반 물리법칙을 초월하는 그 힘은 결국 회원 스스로의 인지에 좌우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갖고 있는 인지의 힘이란 사소한 계기로도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만큼 불안정하다. 신을 향한 맹목적인 충성은 정신의 가장 깊숙한 곳에 새겨져 있었지만 스스로를 향한 믿음은 그 만큼 깊게 아로새기지 못한 자들도 있었다.
재력과 권력을 쥐고 있는 세계커피협회에게는 당연히 적도 많았다. 그리고 그러한 적들에 맞서 싸운 회원들에게 항상 승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집단과는 달리, 신의 능력을 빌려 쓰는 회원이 갖게 되는 패배감과 상실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단순한 개인이 아닌, 신의 힘이 패배한 것이다.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잃은 회원에게 신은 더 이상 힘을 빌려 줄 수 없었다.
“네가 감히 나를 지워버리겠다고?!!”
만델린이 당장이라도 로우 위의 멱살을 잡을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능력을 잃어버렸다고는 해도 회원으로서 신체능력은 그대로였고, 2미터 가까이 되는 거구는 위협적이었다. 로우 위의 한 걸음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발렌타인이 움찔했다. 로우 위는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왼손을 들어 발렌타인을 저지했다.
“만델린. 저는 당신에게 오늘은 커피보다는 코코아를 마시고 싶은 기분이니 회원직을 반납하고 협회를 떠나라고 설득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제가 설득종료를 쓰지 않는 것은 당신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품위있게 물러나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발렌타인은 속으로 작게 혀를 찼지만, 만델린은 눈치 채지 못하고 로우 위의 말을 끝까지 들어버렸다. 험악한 표정이 풀리고 멍한 눈빛이 된 만델린이 로우 위의 이야기를 얌전히 듣기 시작했다. 로우 위는 평온한 목소리 그대로 이미 여러 번 해서 익숙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회원으로서의 신앙과 능력은 별개였다. 아직 능력은 유지하면서 신앙심을 잃은 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왕왕 발생했다. 비록 능력은 잃었을지언정 강한 충성심으로 회원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자들의 존재는 대외적으로는 아름다운 미담이었고 간부들의 평가로는 안타는 쓰레기였다.
협회는 우주의 법칙과 신을 수호하기 위해서 존재해야하고, 회원을 인지하는 것도, 힘을 내려 주는 것도 우주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진다. 협회에 위해가 될 만한 일을 저지르지 않은 이상, 간부들 마음대로 회원을 제명시키거나 협회에서 축출 할 수 없었다. 협회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도 제명이 된 자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하물며 능력을 잃었지만 신에게 여전히 충성을 바치고 있는 기특한 회원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협회가 먼저 잘라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로우 위는 그런 회원들이 스스로 회원이기를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일을 맡고는 했다.
로우 위의 그 업무는 극비로 이루어졌지만, 2년 전 딱 한 번, 로우 위는 독단적으로 그 자리에 발렌타인을 데리고 갔다. 만델린은 강하니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호위가 필요했습니다. 사후 보고에서 로우 위는 그렇게 말했다. 간부들이 그 건에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다는 것을 들켜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간부를 제외한 사람들 중 가장 신뢰할 수 있고 강한 사람을 데려가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 로우 위의 설명이었다. 간부들은 납득하고 넘어갔지만 발렌타인은 그 때 아무런 동요 없이 침착하게 만델린을 상대하던 로우 위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아마 그는 로우 위가 처음으로 설득한 회원이 아닐 것이고, 마지막으로 설득하게 될 회원도 아닐 것이다. 로우 위에게는 발렌타인의 도움이 필요 없었다.
발렌타인은 어둠이 눈에 익을 때 까지 그것을 고민해보았다. 그 때 나를 데려간 이유는 지금 날 호위로 요청 한 것과 같은 이유일까. 만델린에게 담담하게 말을 걸던 목소리와 오늘 오후 차분한 얼굴로 소각장을 바라보던 얼굴이 겹쳤다.
어릴 때부터 꾸준히 훈련해 온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는 로우 위 였지만 정말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이를 설득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감정에 둔해서는 안 된다. 설득종료는 논리와 감정을 찍어 누르는 힘이었지만 바로 그랬기 때문에 로우 위는 더더욱 인간의 사고와 감정에 신경을 썼다. 실제로 설득종료의 힘을 쓰지 않고 설득을 해 낸 임무도 제법 있었다고 한다. 왜 그냥 매번 능력을 쓰지 않느냐는 발렌타인의 질문에 로우 위는 발렌타인의 두 눈을 가리켰다. 내가 내 스스로를 믿지 못하면 끝이니까. 발 딛고 설 기반이 없어진다면 능력도, 더 나아가 존재 자체도 흔들리게 된다. 발렌타인은 눈병에 걸려 3주간 왼쪽 눈에 안대를 하고 지내던 때를 기억해 내고는 몸서리를 쳤다. 한 쪽 눈만 있다면 능력을 쓸 수 있지만, 발렌타인은 두 눈 중 어느 한 쪽을 포기 할 생각이 꿈에도 없었다. 아마 로우 위가 감정을 완전히 내려놓는 날도 오지 않을 것이다. 발렌타인은 로우 위가 협회 내에서 가장 예민하고 감성적인 사람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로우 위가 다른 회원을 지워버리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발렌타인은 잠시 동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아마 그 때 자리에 나온 것이 만델린처럼 위협적인 회원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당면한 과제인 로우 위 보호에만 신경 쓸 수 있지 않았다면 로우 위의 멱살을 잡고 화를 내는 것은 자신이었을 것이다. 완전히 얌전해진 2미터짜리 덩치가 집으로 돌아간 후, 로우 위와 발렌타인은 야외 카페테리아에서 커피를 마셨다. 그때 어떤 대화를 했는지, 온전한 형태를 지닌 말이 오가기는 했는지 발렌타인은 기억 할 수 없었다. 로우 위는 그때도 평온한 얼굴이었다. 협회 간부진들만 알고 있는 1급 비밀임무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실감이 온 것은 이틀 뒤였고 그 때는 이미 로우 위에게 무언가를 물어보기에는 늦은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지금 콜롬비아에서, 그때와 똑같은 목소리와 표정으로 로우 위는 커피 수만 톤을 불구덩이 속에 처넣었다. 로우 위가 하는 행동은 항상 두세 가지 이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단계의 일부였기 때문에, 로우 위의 명확한 의도를 짚어내기는 힘들었다. 공범으로서 죄책감을 나눠지기를 원하는 건지, 위로와 격려를 바라는 건지, 이도 저도 아니면 자신은 로우 위가 갖고 있는 계획의 중요한 장기말의 하나인 건지. 로우 위가 바라는 것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발렌타인은 로우 위가 바라는 결과를 내 줄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아무 의미 없이 소모되는 일회용품이 아니라는 믿음은 있었다. 깔끔하고 친절하게 모든 것을 알려 준 다음 신경을 꺼 버리는 것이 로우 위에게도 편할 것이다. 하지만 로우 위는 아무런 감정도 보여주지 않은 채 발렌타인을 그냥 던져두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발렌타인은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요구받고 있었다. 하지만 로우 위가 무엇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지, 자신이 무엇을 볼 수 있는지, 잡힐듯하면서도 알 수 없었다.
아무런 명암의 구분 없이 시커멓게만 보이던 천장이 얼룩덜룩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구름이 걷히고 달빛이 슬금슬금 벽을 타고 들어왔다. 오른 쪽으로 고개를 돌린 발렌타인의 눈에 벽을 향해 돌아누운 로우 위의 등이 보였다. 발렌타인은 그 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흰 셔츠가 달빛을 받아 푸르게 떠올라 보였다. 옷 주름이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떤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는 죽은 그림자였다. 발렌타인은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며 손을 뻗어 로우 위의 등에 가져다 대었다. 손끝에서 박동이 느껴졌다. 그것이 자신의 심장이 움직이는 박자인지, 로우 위의 호흡 때문에 느껴지는 고동인지 알 수 없었다.
자고 있을까. 아니면 깨어있을까. 눈을 떴을까. 눈을 감고 자는 척 하고 있을까.
너는 그렇게 계속 참고 있는 걸까.
밤이 조용히 창문으로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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