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의 낮은 짧다. 서쪽의 붉은 빛을 잡아먹으며 동쪽하늘이 남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먼지처럼 내리던 눈이 유키무라의 콧등에 내려앉았다가 금방 녹아 사라졌다. 새어나온 한숨이 하얗게 흩어졌다. 공기가 차다. 밤사이에 눈발은 더 거세질 것이다. 등불과 달빛에 의지해 산을 오를까 고민하는 차에 등 뒤에서 자박, 하고 마른 나뭇가지 밟는 소리가 났다. 지난 사흘 간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았으니 저것은 부러 하는 짓이다. 유키무라는 산 입구에서 발걸음을 돌렸다.
“낮에 봐 둔 초막이 있으니 오늘은 거기서 자자.”
이야아, 그런 것도 봐 둘 줄 알고. 성장했네요, 대장. 며칠 만에 처음 건네는 말답잖게 사스케가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옆에 따라붙었다. 옷에서 버석거리는 소리가 났다. 잘게 달라붙은 얼음을 털면서 사스케가 말했다.
“등불, 꺼낼까?”
“아직 해가 남아있으니까 괜찮다.”
하지만 짧은 겨울 해는 금세 모습을 감추어버리기 때문에, 둘은 발걸음을 조금 재게 놀렸다. 산 입구라고는 해도 근처 농가에서 나무며 꼴을 베기 위해 자주 오는 곳이라 이런 장소에는 으레 농민들이 쉬어가기 위한 막집이 있곤 했다. 겨울이면 잠시 묵어갈 여행객들을 위해 화로를 가져다 놓는 마을도 있었다. 오슈의 백성들은 쩨쩨한 걸 싫어한다. 낡았지만 제법 큰 화로 안에 숯까지 그득하게 들어있는 것을 본 사스케가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절반을 꺼내 천장 시렁에 올려두고, 절반만 불을 붙였다. 사스케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유키무라가 일어나 초막 문에 덧대어져 있는 싸리자리를 다시 여미었다. 찬바람이 막아든 초막 안은 금새 훈훈해졌다.
“여기 사람들은 통이 크네. 중간에 한 번만 갈아주면 아침까지 훈훈하겠는데.”
“백성은 그 땅의 지도자를 닮는 법이니 말일세.”
평소 같으면 손사래를 치며 자랑은 다른 데서 하라고 타박을 했겠지만, 사스케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오슈의 주인에 대해 하는 이야기가 아닌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뭐어…, 고민하고 있습니까요, 역시?”
무엇을, 은 말하지 않았다. 유키무라가 화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이런 고뇌와는 연이 없는 삶일 거라 생각했거늘.”
“인생,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법이죠.”
일렁이는 불꽃과 달리 숯은 움직임 없이 속에서부터 조용히 몸을 태운다. 불이 거쳐 가 회색으로 폭삭 내려앉는 작은 숯을 바라보던 유키무라는 눈을 감았다. 손을 눈 가까이로 올렸다가 누르지도 비비지도 않고 퍼뜩 내린다. 사스케가 작게 웃었다.
“쓸 데 없는 조언은 안 하겠습니다. 이건 스스로 생각 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안 말렸나.”
“그렇죠, 뭐. 바보같이 답을 물어보러 가는 거였다면 오슈 국경을 밟지도 못하게 했을걸.”
말해두지만 난 그 사람 안 좋아한다구요? 사스케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화로의 숯에 숨을 훅 불었다. 매운재가 날렸다가 가라앉으며 숯이 붉은 빛을 더 강하게 깜박였다.
“…Hey, 그 장난은 뭐야.”
밤사이에 얕지만 단단하게 얼어버린 눈을 부지런히 밟으며 하루종일 걸어 저녁 식사시간을 훌쩍 넘길 무렵에야 만난 아오바성의 주인은 뜰에 쌓인 얼음 만큼이나 싸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사나다 유키무라가 간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득달같이 무장을 하고 달려 나와 문답무용으로 칼부터 들이댈 이가 웬일로 조용하나 했더니, 성문을 통과할 때부터 이미 연통이 간 모양이었다. 무장은커녕 정장을 제대로 갖춰 입지도 않고 현관에 올라서서 팔짱을 끼고 방문객을 내려다보는 폼새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거부의 뜻을 내비치고 있었다. 대장의 체면을 생각해 일단 대문 안으로는 들여보내 준 모양이지만. 사스케는 속으로 몰래 한숨을 쉬었다. 저 사람의 성격으로는 직접 얼굴을 보고 화를 내기 위해서일지도 모르지. 그러거나 말거나 유키무라는 담담하게 말했다.
“소인은 장난을 치러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오.”
으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마사무네가 유키무라의 눈을 노려보았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쳐 조용히 이글거렸다. 유키무라가 눈을 피하지도, 곤란한 얼굴을 하지도 않는 것을 본 마사무네가 숨을 웃음처럼 내뱉었다.
“올라와. 거기 시노비는 따뜻한 물에 씻고 식사라도 할 수 있게 준비해줘라.”
일개 시노비에게 배려 넘치는 처우이긴 했지만 결국 이야기에 끼지 말라는 소리였다. 우와, 역시 마음에 안 들어. 어쨌거나 며칠 동안 추운 밖에서 고생한 몸에 따뜻한 목욕은 고마운 일이긴 했으므로 사스케는 불평은 딱 한번만 하고 얌전히 시종을 따라갔다. 사스케의 뒷모습을 잠깐 보던 마사무네가 몸을 획 돌렸다. 차박하고 언 마루를 밟는 소리가 났다. 댓돌에 신발을 벗던 유키무라가 마사무네의 발을 바라보았다.
“마사무네공. 발이 얼겠소.”
이미 복숭아뼈 근처와 발뒤꿈치가 새빨갛게 얼어 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맨발에 손을 뻗을 뻔 한 유키무라는 가까스로 손을 거두었다. 하, 하고 웃은 마사무네가 유키무라를 돌아보았다.
“네가 꾸물거리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다.”
정원에 접한 긴 복도를 마사무네가 말없이 걸었다. 쌓인 눈 위로 달빛이 소금처럼 뿌려져 있었다. 눈이 시렸다. 차박거리는 맨발 뒤를 버선을 신은 유키무라의 발이 둔한 소리를 내며 따라갔다.
손님을 맞을 방 안은 그래도 훈기가 돌았다. 마사무네는 유키무라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화로 옆에 털썩 앉았다. 유키무라가 머뭇거리는 사이 침통한 표정의 코쥬로가 따라 들어와 유키무라에게 방석을 권했다. 유키무라가 감사 인사를 하려는 차에 한쪽 눈으로만 화로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마사무네가 입을 열었다.
“시종은 죄다 어딜 가고 네가 들어와?”
“물건 부수지 마십시오, 마사무네님.”
대답이 아니었지만 대답이 되었다. 기가 찬 듯이 코웃음을 웃는 마사무네에게서 시선을 돌린 코쥬로가 유키무라에게 말했다.
“물론 그쪽도 마찬가지. 그럴 양으로 온 건 아닌 거 같다만.”
“고맙소, 가타쿠라공.”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코쥬로가 방문을 나선지 얼마 안 되어 시종들이 작은 상을 둘 들고 들어왔다. 주안상이 아니라 뜨거운 차와 단 과자가 올라온 다과상이었다. 유키무라가 잔을 들어 입을 축이는 것을 보던 마사무네가 제 몫의 찻잔을 들고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심정 같아서는 술이 필요했지만, 손님을 앞에 두고 주인만 술을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유키무라가 깜짝 놀라 마사무네를 쳐다보았으나, 마사무네의 찻잔에서는 김이 별로 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안심한 듯 입을 다물었다.
“설명해.”
마사무네가 과자 하나를 들어 입에 넣으며 말했다. 바삭하고 설탕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어르신께서 쓰러지셨소. 이번에는 꽤 위중할지도 모르고.”
“가족 상담이라면 다른 데서 해.”
즉시 튀어나온 답에 개운함마저 느끼며 유키무라는 며칠만에 처음으로 웃음 비슷한 것을 얼굴에 그릴 수 있었다. 덕분에 다음 말은 어렵지 않게 흘러나왔다.
“이 사나다 유키무라에게, 다케다군의 총대장을 맡기시겠다 하셨소.”
“…어이, 괜찮은 거냐? 총대장이 이렇게 자리를 비워도?”
“일단 본성에 계시는 야마가타님과 바바님이 정비를 해주고 계시오만….”
다케다의 사천왕이라 불리는 가신 중 하나인 아마가타 마사카게의 땅달막하지만 단단한 체구와 그 만큼이나 우직하고 호승심 넘치는 성격을 떠올린 마사무네가 피식 웃었다. 행정은 바바 노부하루가 다 하겠군. 당장은 합전이 없을 겨울인 게 불행 중 다행한 일이었다. 다케다군에게도, 유키무라 개인에게도.
“그래서, 넋 놓고 있다가 연습 중에 사고라도 친 거냐?”
목소리에서 한심함과 분노가 섞여 가장 아래쪽에 깔린 감정을 숨겼다. 이전이라면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 이유모를 안타까움만을 느꼈겠지만 지금이라면 알 것 같다고 유키무라는 생각했다.
“먼저 사죄를 드리고자 하오.”
“무엇에.”
“슬픔을 알아차리게 된 것에.”
찻상을 당장 집어 던지지 않은 것은 코쥬로의 말이 생각나서만은 아니었다. 마사무네는 숨을 고르며 유키무라의 눈을 바라보았다. 마사무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쪽이 아닌, 붕대 아래에 숨은 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