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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로우....?
17살.
로부스타가 결국 열쇠를 가져와서 방문을 열었을 때, 방 안은 비어 있었다. 로부스타는 즐겨보는 홍콩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침착하게 침대의 온기를 재어보고 창틀을 조사하는 대신, 문을 닫고 계단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협회에 연락하지는 말고 당장 페리 국제선 이용객이랑 유로스타 탑승객 명단 수배해!!”
지난 사흘간 아무 말 없이 방 안에 틀어박힌 발렌타인을 향해 위로와 간청, 회유와 협박까지 하며 문을 두드리던 사람들은 차라리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각자 휴대폰을 들고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로부스타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로우 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어젯밤에 나간 걸까요?”
“오늘 새벽일 수도 있지. 어쨌든 넉넉잡아 이미 열 시간은 지났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로부스타는 짧게 혀를 찼다. 진작에 방문을 때려 부수고 열어봤어야 했어. 저놈이 제 발로 나오길 젊잖게 기다리는 게 아니었는데. 로우 위가 좀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면 설득으로 발렌타인을 나오게 할 수 있었겠지만 로우 위는 오늘 아침에 막 도착한 터였다. 로우 위가 한숨 같은 웃음을 지었다.
“어쨌건 제 발로 나오긴 했네요.”
“창문 말고 문으로!”
로부스타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마뜩찮은 듯이 올려다보았다. 창문으로 몰래 내려와서 집을 나서는 데에는 굳이 능력을 쓸 것도 없었을 것이다. 이층 창문 정도는 회원이 아닌 일반 청소년들도 쉽게 오르내리곤 하는 높이다. 발렌타인을 방에 가두고 외출금지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니고, 제 손으로 방문을 걸어 잠그고 틀어박힌 놈을 밖으로 끄집어내려고만 생각했었기 때문에 창문으로 나가 버릴 거라고는 차마 생각도 못 했던 것이 실수였다.
아직 협회에 알리기는 곤란한 상황이라 아마렐로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지만, 일족의 힘을 동원하면 며칠 안에는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행선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평소에도 프랑스 프랑스, 노래를 불렀던 발렌타인이다. 비행기를 탈만한 여유는 없겠지만 프랑스 정도는 런던에서 갈 수 있는 방법이 많았다. 최악의 경우, 원근감 생까기를 통해 비합법적으로 도버해협을 건넜을 가능성도 있지만 일반인도 많은 지역에서 그런 모험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더군다나 최대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야 하는 가출 청소년의 입장이라면.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아니, 넌 그냥 집에서 쉬고 있어라. 하루 이틀 정도는 집이 빌지도 모르겠구나.”
로부스타는 로우 위를 만류하고는 때마침 울린 전화를 받으며 문 밖으로 나갔다. 로우 위는 고개를 갸웃하며 로부스타의 등을 바라보았다. 어른들이 모두 집 밖으로 나간 걸 확인한 로우 위는 로부스타의 서재로 발을 옮겼다. 책장 아래쪽에서 넓은 책을 하나 찾아서 책상에 폈다. 영국 지도책. 발렌타인은 프랑스로 가고 싶다고 했다. 프랑스는 런던에서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그래서 로우 위는 지도의 북쪽을 보았다. 기차역을 나타내는 기호가 드문드문 보였다. 짧은 도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서소.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열일곱 살짜리가 용돈을 털어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
런던에서 서소까지는 기차로 열일곱 시간이 걸린다. 로우 위는 기차 시간표를 확인하고 바로 집을 나와 공항으로 갔다. 에든버러까지는 비행기를 타고 간다면 서소로 가는 시간을 더 줄일 수 있다. 운이 좋다면 먼저 도착해서 발렌타인을 기다릴 수도 있고, 발렌타인이 어젯밤 야간열차를 탔다면 발렌타인과 몇 시간 차이 나지 않게 도착 할 수 있을 것이다. 로우 위는 그 몇 시간 사이에 발렌타인이 서소를 떠나지 않았기를 바라며 비행기에 올랐다.
로우 위가 서소 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열시가 다 되어 있었다. 벽돌로 만들어진 작은 무인역의 바닥이 냉기를 밀어올리고 있었다. 뻣뻣한 목을 주무르며 역사로 들어선 로우 위는 등받이 없는 벤치에서 동그마니 웅크린 등과 푹 숙인 금발을 발견했다.
“발렌타인.”
와락, 소리를 내며 옆에 내던져진 크로스백을 끌어안는다. 금방이라도 벤치를 박차고 일어설 듯 긴장된 다리에 다시 힘이 풀렸다. 발렌타인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돌아보았다.
“로우 위.”
“집에 가자.”
발렌타인이 고개를 저었다. 로우 위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3m. 역사 안을 밝히고 있는 형광등이 깜빡였다.
“난 가면 안 돼.”
“왜?”
“난 무서워.”
뭐가. 라고는 묻지 않았다. 전에 똑같은 대화를 한 기억이 있다. 발렌타인은 그때 울고 있었다. 로우 위는 그때 해 준 대답을 다시 들려주었다. 그때와 생각도 바뀌지 않았으니까.
“넌 괴물이 아니야.”
눈동자가 흔들렸다. 발렌타인은 로우 위의 얼굴에서 시선을 내렸다가 무서운 것이라도 본 표정으로 눈을 돌렸다.
“로우 위, 넌 몰라.”
“나는 네가 말해 준 것만 알고 있으니까. 내가 알아주길 바라면 말 해. 도망치지 마.”
발렌타인의 다리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일어나고 싶은 건지, 그대로 굳어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말이 두서없이 쏟아져 내렸다.
“그때와 다르지 않았어. 넌 그때 괜찮다고 해 줬지. 그래서 그렇게 믿었어. 괜찮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잊을 수는 없었어. 그래서 알 수 있었어. 그때와 같은 느낌이었어. 똑같아.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똑같았어..... 어쩌지, 로우 위? 손에 남은 감각이 사라지지 않아.”
8년 전이었다. 원근감 생까기를 막 익힌 발렌타인은 의욕에 넘쳐 있었고 공간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능력의 등장에 간부들도 크게 기꺼워했다. 보호자를 동반한 현장 투입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능력이 아직 완전히 제어가 안 되는데다가 임무를 몇 번 나가보지 않은 발렌타인의 상황을 고려해서 능력은 대상은 항상 생명이 없는 물체들뿐이었다. 발렌타인에게는 게임을 하는 감각이었을 것이다. 작은 주먹을 창문 건너편을 향해 휘두르면 철문이 우그러지거나 감시탑이 쓰러졌다. 능력의 특성 상 현장 한 가운데에 던져질 일도 없었기 때문에 발렌타인은 위험에 처할 일도 없었다. 임무 현장에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는 빤빤하고 영리한 아홉 살짜리의 모습이 동행했던 회원들에게 방심을 심어주었다. 발렌타인은 다른 회원들이 전투 위치에서 대기하는 동안 혼자서 13층의 스카이라운지에서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어른 회원들과 같은 대접을 받은 것 만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발렌타인은 그 다음의 일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귀 옆을 스치고 지나간 총알, 무전기로 다급하게 이야기하던 남자들, 이쪽을 향해 뛰어 오던 발소리, 그리고.
현장 빌딩의 비디오를 판독하기 전에는 습격자가 몇 명인지 알 수 도 없었다고 한다. 발렌타인은 기억하지 못했고 다른 회원들은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총성을 듣고 발렌타인 곁으로 달려온 회원이 본 것은 검붉은 색의 으깨진 덩어리들과 거친 시멘트 바닥에 미친 듯이 손바닥을 뭉개고 있는 발렌타인의 모습이었다.
손 치료를 받는 내내 발렌타인은 괴성을 지르며 발작을 했다. 의사는 양 손을 더 건드리지 못하도록 붕대로 단단히 묶었다. 한나절 내내 너무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로 진이 다 빠져 병실 구석으로 가 쭈그리고 앉은 발렌타인에게 로우 위가 손수건을 들고 다가갔다.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닦아주고 헝클어진 머리를 말없이 손으로 빗어주었다.
“로우 위, 나 어쩌지. 너무 무서워.”
잔뜩 쉬어서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발렌타인이 아홉 시간 만에 한, 제대로 된 말이었다. 발렌타인은 로부스타에게도, 카운슬러에게도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등 뒤에서 로부스타가 의자를 덜컹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평소 같았다면 뒤를 돌아보고 로부스타의 표정을 확인했겠지만, 로우 위는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불쑥 말을 꺼냈다.
“괜찮아.”
“......뭐가...?”
“네 탓이 아니야. 넌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무서워 할 필요 없어.”
“하지만 손이.... 손에......”
로우 위가 발렌타인의 손에 감긴 붕대를 풀었다. 발렌타인은 손을 조금 떨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긁히고 곪은 손바닥이 드러났다. 로우 위는 조심스럽게 발렌타인의 손을 잡았다. 발렌타인은 로우 위의 손이 맞닿은 부분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괜찮아. 지금 이 느낌만 기억해. 괜찮아 질 거야. 괜찮아.”
발렌타인은 반년 정도 얌전히 상담을 받으러 다녔다. 임무 투입은 로부스타가 격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한동안은 감각을 조절하는 것을 중심으로 재활 훈련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렌타인은 웃는 얼굴로 이층 창가에 있는 로부스타를 집어 올 수 있게 되었고 로부스타도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임무에 나가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발렌타인은 전보다 더 느긋해졌고, 더 웃게 되었고, 아주 조금 더 밤에 밤잠이 줄었다.
협회는 만성적인 인력 부족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발렌타인이 이미 한 번의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해 보였기 때문에 간부들은 아무리 신의 능력을 나눠받은 회원일지라도 일개 청소년에 불과하다는 걸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공격이 쏟아져도 침착한 태도로 상대를 다치지 않도록 제압할 수 있는 열일곱 살짜리는 얼마나 믿음직스러운가. 이미 A랭크에 이름을 올린지도 몇 년이 지난 발렌타인은 단독 임무도 성공적으로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회원의 백업으로 파견될 만큼 신뢰를 받게 되었다. 동료가 메인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발렌타인은 후방에서 돌발상황에 대비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더 잘 볼 수 있었다.
경비행기가 6층 전면창을 향해 돌진했다. 군데군데 철골구조가 노출 될 정도로 낡은 건물이 6층을 기점으로 내려앉는 모습은 정지된 화면처럼 보였다. 1층에서 뛰어나오는 회색 가디건을 본 순간 발렌타인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우득하고 뼈가 뭉개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기절한 동료가 눈앞에 나타난 순간, 발렌타인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완벽한 사고였다. 차라리 그 손이 공격 의도를 담고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동료를 구하기 위해 뻗었던 그 손은 8년 전과 똑같은 감각을 남겼다.
임무를 완료하고 귀환 한 지 사흘 뒤, 발렌타인은 지갑과 다이어리, 필통만 던져 넣은 크로스백을 들고 집을 나갔다.
로우 위는 어떤 말을 해 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평생 공유하기가 불가능한 감각에 대해서는 위로도 매도도 할 수 없다. 8년 전에도, 지금도, 로우 위가 발렌타인에게 하고 싶은 말은 같았다.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고. 네 탓이 아니라고. 넌 괴물이 아니라고. 그건 로우 위의 진심이었고, 발렌타인도 그 말을 믿었다. 괴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제 발렌타인은 스스로를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로우 위는 그 이상 어떤 말을 해 줄 수가 없었다. 차라리 너는 괴물이니까 그런 공포 따윈 날려버리라고 설득해버린다면 쉬운 일이겠지만, 로우 위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로우 위는 고개를 숙여 주머니에서 캔커피를 하나 꺼내들었다.
“캔을 따 줄 사람도 없으니까 불편해서 안 되겠어. 와서 이거 따 줘.”
로우 위는 정말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발렌타인이 인간으로 남아주기를 바랐다. 말이 더 이상 닿을 수 없다면, 발렌타인이 숨 쉴 수 있는 공기라도 만들어주고 싶었다.
발렌타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울음 같은 웃음이었다. 로우 위의 손끝에서 캔 커피가 달랑거리고 있었다. 오른 팔에 깁스를 한 채로는 캔을 딸 수 없다. 회복력이 빠른 회원의 몸이라 해도, 뼈가 완전히 으스러졌다면 회복에는 몇 주가 걸렸다. 팔이 뭉개진 지 아직 나흘밖에 되지 않은 로우 위는 단단하게 고정된 깁스를 한 채였다.
발렌타인은 벤치에서 일어나 로우 위 앞까지 걸어와 말없이 캔을 받았다. 딸깍하고 알루미늄 핀이 꺾이는 소리가 났다. 한 모금 마신 로우 위는 눈썹을 잠시 찡그렸지만, 말없이 선 자리에서 한 캔을 다 마셨다. 빈 캔을 받아든 발렌타인이 쓰레기통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동안, 로우 위는 방금 전 까지 발렌타인이 앉아 있던 벤치에 앉았다. 캔을 버리고 돌아오는 발렌타인에게 로우 위가 왼손을 내밀었다. 발렌타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로우 위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발렌타인이 주먹을 쥐기라도 할 듯이 손을 움찔거렸지만 긴장한 손 끝을 완전히 그러쥐지도 못했다. 파란 눈동자가 눈꺼풀에 꾹 덮였다가 다시 드러났다. 조심스럽게 뻗은 손이 로우 위의 손을 마주잡았다. 쌀쌀한 가을 날씨 때문에 로우 위의 손은 조금 차가웠다. 발렌타인은 손이 떨리는 것이 그 차가움 때문이라고 로우 위가 생각해 주기를 바랐다. 마주 닿은 손은 금방 체온이 돌아 따뜻해졌다. 로우 위는 역사의 천장에서 깜빡거리는 전구를 올려다보았다. 발렌타인은 고개를 숙인 채 로우 위 옆에 앉았다. 둘은 그렇게 기차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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