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간론파/글
히코마) 실연의 방향성에 대하여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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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단단하게 굳어 있는 석고 깁스 위에는, 이것저것 낙서가 잔뜩 적혀 있었다. 깁스까지 한 김에 병가를 받아 기숙사에서 쉬는 동안 얼굴을 비추고 가 준 동료들이 남기고 간 우정의 흔적이었다. 지부에 따라서는 한창 바쁜 곳도 있다고 들었는데, 다들 어떻게든 병문안을 와 준 것이다. 살짝 금만 간 수준에 회복속도도 워낙 빨라서 전혀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는 설명했지만, 히나타가 입원을 할 만큼 다치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비록 남겨진 낙서의 대부분은 히나타를 놀리는 말이었지만.
사흘 전에 다나카가 남기고 간 의외로 팬시한 햄스터 그림을 바라보던 히나타는 어쩐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이면 석고를 잘라내고 깁스를 풀기로 했기 때문이다. 현장에 다시 복귀 할 일을 속으로 헤아려 보고 있는 중에, 다리에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히나타는 고개를 들었다. 수건을 손에 든 코마에다가 히나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히나타군, 머리 감겨 줄게.”
“아, 고마워.”
이제는 거의 완쾌되었기 때문에 머리 정도야 잠시 한쪽 다리로 버티고 서서 혼자서도 감을 수 있었지만, 코마에다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병수발을 들려고 하고 있었다. 아마 첫 날 히나타가 말한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괜히 행운의 리바운드에 대해서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대형사고를 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조금 바쁜 정도가 딱 좋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히나타는 평소라면 저 혼자 할 수 있었을 일도 그냥 코마에다에게 맡겨버리고 있었다. 사귀게 된 지 얼마 안 된 연인의 조심스러운 손길에 좀 더 응석을 부리고 싶은 마음이 생긴 걸지도 모른다.
목욕용 낮은 의자에 옷을 입은 채로 앉는 것도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욕실 바닥에 다리를 쭉 뻗고 욕조에 등을 기대자, 곧 코마에다가 샤워기를 붙잡고 물을 틀었다. 솨아, 하는 물소리가 머리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차갑거나 뜨겁거나 별로 상관이 없다고 말했는데도, 코마에다는 늘 신중하게 물 온도를 맞추었다.
“온도 괜찮아?”
“아, 딱 좋아.”
짧은 머리카락이 샴푸 거품에 부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코마에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파고드는 코마에다의 손가락에 저절로 입꼬리가 풀리려고 하는 것을, 히나타는 꾹 참았다. 거품이 남아 있지 않도록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헹구는 물의 온도에 따끈따끈한 기분이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머리를 수건으로 잘 감싼 코마에다가 히나타의 손을 잡고 일으켜주었다. 바닥이 미끄러운 욕실에서는 목발을 사용하는 게 오히려 위험하기 때문에 코마에다의 어깨를 빌리고 있었다. 물은 거의 튀지 않았지만, 더운 물이 뿜어낸 수증기를 잔뜩 머금은 옷이 몸에 척척하게 달라붙었다.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으려니, 곧 코마에다가 드라이기를 갖고 왔다.
코마에다에 비해서 훨씬 짧은 히나타의 머리는 금방 말랐다. 조금 뻣뻣한 감이 있는 머리카락이 따뜻한 공기를 머금고 보송보송하게 떠올랐다. 히나타는 머리를 한 번 푸르륵 털었다. 히나타군은 가끔 강아지 같지. 코마에다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머리가 짧아서 그런가? 금방 마르네.”
“네 머리는 말리기 힘들겠네. 매번 고생이지?”
“드라이기를 사용하면 크게 힘들지는 않으니까….”
히나타가 몸을 반쯤 돌려서 팔을 뻗었다. 손에 가벼운 감촉이 느껴졌다. 코마에다의 머리카락은 가늘고 윤기가 없다. 숱이 많은 것에 비해서 무게감이 없는 느낌이다. 한동안 코마에다의 머리카락을 만져보던 히나타는 문득 안에 숨어있는 귀를 발견했다. 따뜻한 욕실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약간 열이 올라 있었다. 귀밑머리가 신경 쓰였던 히나타는 코마에다의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겼다.
“네 머리카락은 확실히 감촉이 나랑 많이 다르네.”
“히나타군은 의외로… 이런 부분에서 사양이 없지?”
“어? 나 뭔가 이상한 행동 했던가?”
입을 꾹 다문 코마에다가 잠깐 동안 히나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곧 허리를 펴고 몸을 일으켰다. 히나타의 손이 자연스럽게 코마에다의 얼굴에서 떨어졌다. 방금 전 히나타가 넘긴 머리카락을 코마에다가 한 번 더 가다듬어서 넘겼다.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머리카락을 넘긴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히나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코마에다의 손이 귀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계속 귀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히나타는 퍼뜩 떠오른 생각에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너. 스킨십을 별로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혹시 귀도 약해?“
“어, 어?”
“뭔가, 내가 얼굴 가까이서 이야기 할 때도 평소랑 달리 긴장하는 것 같고.”
영차, 하고 한쪽 다리에 몸무게를 지탱하고 히나타가 몸을 일으켰다. 황급히 목발을 건네주는 코마에다의 팔을 히나타가 꽉 하고 잡았다. 얼굴을 들여다보자, 목만 뒤로 몇 센티미터 물러난다.
“딱히 귀가 약하지 않아도 얼굴이 가까워지면 누구라도 긴장하지…?”
“…그런가? 이 정도는 보통이라고 생각하는데.”
연애가 처음인 것은 히나타도 마찬가지라 확언을 할 수는 없었지만 보편적인 연인들 간의 거리감을 생각하면 그렇게 무리해서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섬에서 살인게임에 휘말렸을 때의 코마에다가 좀 더 얼굴을 가까이 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이다.
“…….”
“히, 히나타군…? 어쩐지, 얼굴 더 가까워지지 않았어…?”
팔을 잡고 있는 것과 반대쪽 손이 코마에다 등 뒤의 벽을 짚었다. 히나타의 팔 안에 갇히는 꼴이 된 코마에다가 얼굴을 슬그머니 피했다.
“아, 미안.”
“어쩐지 전혀 안 미안해 보이는 건 내 기분 탓이겠지…?”
“…글쎄.”
“으응, 하긴 나 같은 쓰레기에게 히나타군이 사과라니 당치도 않지! 형식만이라도 사과를 해 준 것에 감사해야겠지?”
“…또 그런 식으로 말하고 말이야….”
히나타는 한숨을 푹 쉬고는 팔을 떼어냈다. 아직 목발을 들고 있는 코마에다의 손에서 목발을 채어가자, 코마에다가 황급히 손을 놓았다. 이제 목발은 있으나마나 했지만, 아무래도 보는 입장에서는 아직 아슬아슬한 모양이었다. 목발을 잘 짚은 히나타가 몸을 돌렸다.
“미안. 너도 이제 씻어.”
“…응.”
등 뒤로 젖은 수건을 주섬주섬 챙기는 소리가 들렸다. 욕실 문이 다시 닫히고, 물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히나타는 크게 숨을 몰아쉬면서 침대에 앉았다. 나 혼자서 조급해하고 있나? 얼굴을 정면에서 가까이 했을 때 코마에다의 얼굴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던 속눈썹이 어쩐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으으윽….”
히나타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뒤집어쓰자 곧 노곤한 공기가 몰려왔다. 하지만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한참 뒤 코마에다가 욕실에서 나왔다.
“히나타군, 자?”
히나타는 아무 대답 없이 벽을 본채로 누워있었다. 의자를 작게 끄는 소리와 함께 수건이 부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2, 3분 정도 지났을까, 히나타는 코마에다가 드라이기를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다. 지금이라도 잠들지 않았다고 말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 동안도 시간은 계속 흘렀다. 초침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삼 분, 오 분, 십 분, 십칠 분. 결국 32분이 지나서야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꾹꾹 눌러가며 머리를 말리던 코마에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히나타의 등 뒤로 침대가 푹 꺼지는 것이 느껴졌다.
“잘 자, 히나타군.”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히나타는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늦은 아침, 잠이 깨면서 히나타는 품 안에서 평소에는 느끼지 못한 온기를 느꼈다. 눈꺼풀 너머로 느껴지는 햇빛은 이미 밝은 상아색이었다. 눈을 떠보니 히나타의 팔 안에 안긴 코마에다가 히나타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간병 때문에 코마에다가 히나타의 방에서 같이 생활하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코마에다는 의외로 아침에 깨어나는 게 빨랐다. 이 전에는 대체로 히나타가 출근 전에 코마에다의 방에 들러서 조금 늦게 아침준비를 하는 코마에다를 재촉하곤 했었다. 그래서 히나타는 막연히 코마에다는 아침잠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의외롭게도 지난 2주 동안 거의 매일 코마에다는 히나타보다 늦게 잠들고 먼저 일어났다. 첫 날 당연한 듯이 거실에 이불을 깔고 누우려는 코마에다를 뜯어말리고는 침대 옆자리를 강요했었기 때문에, 혹시 침대가 좁아서 신경이 쓰이는가 걱정도 했었다. 하지만 낮에 비교적 피곤해 보이지도 않았고, 넌지시 물어보았을 때는 원래 수면 시간이 이 정도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렇다고 활기차게 아침을 시작하는 것은 아니어서, 아침이면 보통 이렇게 잠이 완전히 깰 때 까지 침대에 누워 있곤 했다. 요컨대 눈을 뜬 이후에 침대에서 나오기까지의 시간이 긴 것이다.
하지만 평소의 컨디션을 생각하더라도 오늘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늦었다.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코마에다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던 히나타는 코마에다의 다리 위에 턱 하고 올라간 자신의 다리를 깨달았다. 다행스럽게도 석고 깁스를 한 쪽은 아니었지만 가벼운 무게는 아닐 것이다. 황급히 다리를 치우면서 코마에다가 딱딱하게 차렷 자세로 몸을 굳히고 있다는 것도 덤으로 알게 되었다.
“아, 미안. 무거웠지?”
“아, 아니…. 아닌데….”
“그냥 치워버리지 그랬어.”
코마에다의 안색이 어쩐지 빨개졌다 파래졌다 하는 것 같아서 히나타는 몸을 반쯤 일으켜 코마에다를 내려다보았다. 코마에다는 식은땀까지 뻘뻘 흘리고 있었다. 자신이 어젯밤 잠들기 전 조급함에 짜증 비슷한 것을 낸 것을 기억해낸 히나타가 혀를 차면서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땀으로 약간 젖은 코마에다의 이마와 히나타의 이마가 맞닿았다.
“열이 좀 있는 거 같은데. 어제 머리 제대로 못 말리고 자서 그런 거 아냐?”
“미안….”
말하고 나서 아차 했지만, 코마에다의 사과가 더 빨랐다. 히나타가 어젯밤에 먼저 잠들지 않았다는 것을 코마에다는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한 히나타는 잠시 망설이다가, 한숨을 쉬고는 몸을 일으켰다.
환자가 둘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쪽이 아침이라도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침대 안쪽에서 잠들었기 때문에 히나타는 코마에다의 몸을 넘어서 침대 밖으로 내려갔다. 다리가 온전했다면 벌떡 일어나서 내려갈 수 있었겠지만 깁스가 그것을 방해했다. 히나타는 자칫 석고 덩어리로 코마에다의 몸을 차버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코마에다의 몸을 타고 넘었다. 내려다보이는 코마에다의 눈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응우우으으으….”
“너 상태가 진짜 안 좋아 보여. 나 참…, 간호 하던 사람이 쓰러지면 어쩌자는 거야….”
대답을 제대로 못하는 코마에다에게 다시 이불을 잘 덮어주고, 히나타는 침대 옆에 세워둔 목발을 짚고 주방으로 향했다. 간병을 위해 이것저것 노력하긴 했지만 요리만은 코마에다가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는 영역이어서, 당분간은 기숙사 식당에서 도시락을 사와서 먹거나 마트에서 배달시킨 반 조리 식품을 먹고 있었다. 미래기관의 기숙사 근처는 다른 곳보다 훨씬 더 빠르고 안정된 회복을 하고 있어서 제법 큰 대형마트도 정상적으로 운영을 하고 있었다. 세계 곳곳의 식품이며 생필품 회사도 많이 재건되어서인지, 품목도 제법 구색을 갖추고 있다.
오늘은 일단 비상으로 사둔 레토르트 죽이라도 먹을까. 히나타는 비닐 포장을 벗긴 죽 두 그릇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다. 계란죽은 비려서 못 먹고 생선이나 고기가 들어간 것은 속이 부대끼고 견과류나 고구마, 호박이 들어간 것은 들척해서 못 먹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코마에다와 교우를 계속 하면서, 코마에다가 얼마나 가리는 것이 많은지는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결국 히나타의 집에 쌓여 있는 것도 자연스럽게 흰죽이 되었다. 코마에다는 애초에 죽을 좋아하지 않지만, 아플 때는 역시 이것만한 게 없다는 것이 히나타의 지론이었다.
적당히 데워진 죽과 숟가락을 쟁반에 챙겨서 한 손으로 들고, 다른 쪽 팔 아래에 끼운 목발이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방으로 돌아오자, 코마에다가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코마에다 자리 옆에 걸터앉은 히나타가 코마에다 몫의 죽을 한 숟가락 뜬 다음에 후후 불었다.
“자.”
“…….”
코마에다가 말없이 입을 벌렸다. 한 번 식혔다고는 해도 역시나 뜨거웠는지, 하후하후 하는 숨소리가 들렸다. 두 번째는 조금 전 보다 더 열심히 식혀서 내밀자 불평 없이 잘 받아먹는다. 그대로 세 숟가락 정도 더 먹이자, 코마에다가 입을 열었다.
“히나타군은….”
“응?”
“미안하면 이렇게 나한테 뭘 자꾸 먹이지.”
“어, 어?”
히나타는 공중에 숟가락을 멈춘 채로 눈을 깜빡거렸다. 코마에다가 아까보다 고개를 조금 더 숙여서 숟가락 위에 얹힌 죽을 받아먹었다. 고개를 숙이는 통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옆으로 넘기자 조금 발그레해진 귀가 보였다.
“어라, 지금까지 눈치 못 챘어?”
“…어제 일을 사과 할 타이밍을 뺏긴 건 눈치 챘어.”
숟가락을 죽 그릇 옆에 내려놓은 히나타가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아까보다 안색이 훨씬 더 좋아진 코마에다가 후후, 하고 소리 내서 웃었다.
“으응, 히나타군은 사과할만한 일은 하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간호 때문이라고는 해도 나 같은 녀석이랑 이렇게 오래 같이 생활하는 건 짜증 날 테고…. 역시 내가 사과하지 않으면.”
코마에다적으로는 완전히 평소 때의 텐션을 되찾았고, 히나타적으로는 상태가 악화된 걸로 느껴졌다. 울컥하고 대답하려던 히나타는 숨을 한 번 골랐다. 이번에 확실히 말해두지 않으면 또 어젯밤의 반복일 뿐이다. 호흡 3번 정도의 시간동안 말을 입 안에서 굴리던 히나타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네가 계속 옆에 있으니까 평소보다 조금…, 날카로워 진 건 사실이야.”
아핫, 하고 웃으면서 뭐라 대답하려고 하는 코마에다의 뺨에 오른손을 가져가자 코마에다가 곧 입을 다물었다. 히나타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코마에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코마에다는 웃는 낯 그대로 히나타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사람이랑 계속 같이 있으면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잖아. …뭐, 이것도 변명이지만.”
마지막 말은 거의 입 속으로 작게 웅얼거리듯이 말했지만 코마에다의 귀에는 확실히 들렸을 것이다. 코마에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히나타 역시 얼굴이 화끈해지는 게 느껴졌다. 스물네 살 먹고 이게 무슨 꼴이야.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머릿속은 열일곱 살의 수학여행에서 벗어난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았으니까.
“…저기, 코마에다….”
뭘 먹던 중에는 절대로 안 돼. 하다못해 아이스크림이라던가, 초콜렛이라던가, 코마에다는 단 걸 싫어하니까 홍차라던가. 아니, 그런 향기 나는 음식은 내가 잘 못 먹으니까 역시 녹차…. 머릿속에서 조그만 꿀벌 같은 게 끊임없이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히나타는 움직이는 몸을 멈출 수가 없었다. 무릎 위에 올려둔 쟁반이 떨어지지 않게 왼손으로 꼭 잡은 히나타는 그대로 코마에다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각도가 조금 이상했지만 어떻게든 입술과 입술이 만날 수는 있었다.
몇 초 지났을까, 그 이상 무언가를 하지 못하고 입술만 붙이고 있던 히나타가 얼굴을 다시 원래 위치로 돌리자, 코마에다가 말없이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얼굴에서 붉은 물이 뚝, 뚝 떨어질 것 같았다. 히나타는 자기 목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너무 쉬어버리지 않았나 걱정했다.
“…미안.”
“……!”
물을 끼얹기라도 한 듯,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던 코마에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잠시 숨을 고르는 듯, 어깨가 약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조금 뒤 고개를 든 코마에다가 히나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눈가가 약간 붉어져 있었다.
“아냐. …고마워.”
“으, 응….”
“…….”
“그럼, 마저 먹을까. 오늘, 병원 가야 하니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코마에다가 이번에는 제 손으로 죽을 입으로 가져갔다. 히나타 역시 자기 몫의 죽을 빠르게 먹었다.
3.
히나타는 입에 물고 있던 꽁초를 버리고 새 개피를 입에 물었다. 담배를 배운 것은 신세계 프로그램에서 나온 이후이지만, 그 이후로도 몇 번 입에 대지는 않았다. 하지만 요 몇 주 동안 히나타는 거의 하루에 한 갑 꼴로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피우지는 않지만 흡연실에 따라 들어와서 히나타를 살펴보던 소우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직도 소식이 없냐.”
“…아아.”
주어는 말하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지금 히나타가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코마에다 뿐이었다. 소우다가 머리를 긁적이면서 곤란한 얼굴을 했다. 도움을 주고 싶어도 마땅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담배연기 때문만은 아닌 갑갑한 공기가 주변에 내려앉았다.
그 날, 미래기관 산하의 직원 전용 병원까지 운전을 해 주고, 히나타가 깁스를 완전히 푼 발을 딛고 서는 것을 도와주는 내내, 코마에다는 거의 말이 없었다. 어쩐지 열없는 기분이 들어 코마에다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 힘들었던 것은 히나타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히나타 역시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히나타에게는 무겁거나 싸늘하지 않은, 조금 두근거리는 침묵으로 느껴졌다.
기숙사까지 다시 도착하고, 이 주 만에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 코마에다의 뒷모습을 배웅 할 때도, 히나타는 아무런 전조도 느끼지 못했다. 내일 봐. 이 주 동안 한 번도 한 적 없던 인사를 했을 때, 코마에다는 쑥쓰러운 듯이 웃었다. 히나타 역시 마주 미소를 지었다.
며칠 만에 혼자 누운 침대가 유난히 넓게 느껴져서 조금 외로웠지만, 그것은 내일 아침에 또 만날 것을 예고하는 외로움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히나타는 그 외로움마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문자라도 해 볼까, 생각했지만 같은 건물에, 바로 조금 전 까지 얼굴을 본 사람에게 새삼 문자를 하기도 어색해서 그대로 휴대폰 화면만 보면서 고민을 하다가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내일은 간만에 내가 코마에다를 깨우러 가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깨끗하게 비워진 코마에다의 개인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너무 오래간만이라서 방을 잘못 찾은 거라고 생각했다. 문 앞의 명패를 세 번이나 다시 확인한 다음에는 이십구 분 정도 현관에 멍하니 서 있었다. 출근 안 하느냐는 지부장의 연락을 받고야 히나타의 정신이 겨우 현실로 돌아왔다.
하루 종일 지부장을 따라다닌 결과, 지부를 이전했다는 소식만을 겨우 얻었을 뿐이다. 몇 지부의 어디 소속으로 바뀌었는지는, 극비였다. 어디의 어느 단체가 일을 이따위로 급하게 처리하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왔지만, 히나타는 겨우 꾹 눌러 참았다. 그 코마에다 나기토가 저지른 일이다. 이 정도로 놀라서는 앞으로가 곤란하다.
마스크로 얼굴을 숨긴 키무라는 진심으로 곤란하다는 표정을 했지만, 말해줄 수 없는 모양이었다. 평소 두 사람의 상황을 많이 배려해주는 키무라를 더 곤란하게 만들수도 없었고, 모르는 것은 정말인 모양이라서 히나타는 이 이상 키무라를 괴롭히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코마에다를 찾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기로 생각했다. 주된 희생자는 히나타 하지메이다.
부상 때문에 이 주 동안 현장에서 떨어져 있던 것도 있어서, 코마에다의 탐색에만 시간을 투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휴식기의 공백을 매우기 위해 평소보다 훨씬 더 근무시간을 늘리고, 연락이 닿는 모든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고, 실낱같은 정보나마 어떻게든 정리하면서, 한 달이 넘게 히나타는 잠자고 밥 먹는 시간도 아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결론은, 코마에다는 북반구에는 있다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찾아봐야 할 영역이 지구의 절반 분량만큼은 줄어들었다.
현재 열심히 절망을 근절하기 위해서 직접 발로 뛰고는 있지만, 키보가미네 학원 77기에 대한 기관 내의 시선은 아직 곱지만은 않았다. 전적이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감내하고는 있지만, 기분은 씁쓸했다. 특히나 이런 식으로 한 지부 내에 3명 이상의 77기생이 모여 있지 않도록 인사가 정해진 것을 실감하게 될 때면 더더욱. 지금 히나타가 있는 곳에 소속된 사람은 코마에다와 소우다 뿐, 그나마 소우다는 기술과에 소속되어 있어서 업무 중에 자주 얼굴을 마주하지도 못한다.
코마에다가 자취를 감추어버린 일은 온전히 히나타와 코마에다의 문제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는 않지만 힘들 때 격려 한 마디라도 건네주는 친구가 바로 곁에 있어주는 것은 큰 용기가 된다. 이럴 때 곁에 친구가 별로 없다는 것은 히나타에게 더 견디기 힘들었다.
며칠 만에 복도에서 만난 소우다가 잠시 대화할 시간을 겨우 만들어주었지만, 담배를 피우지도 않는 동기와 함께 흡연실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것도 히나타의 미안함 중 하나였다.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해주는 소우다에게 감사하면서, 히나타는 다시 불을 붙였다.
“어디 있는지, 본부에서는 뻔히 알면서 말이야…. 너무들 하네.”
“…….”
“뭐, 어떻게든…. 조금씩 진척을 보이고는 있잖냐.”
“그렇긴 하지. …고맙다.”
말 수가 많이 줄어든 히나타를 신경 쓰듯이, 소우다는 평소의 다섯 배는 더 혼자서 떠들었다.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가식으로나마 거기에 맞장구를 쳐 줄 기력이 히나타에게는 없었다. 꾸며낸 반응을 돌려준다는 것을 알면 화 낼 테니까, 그것도 고마운 일이다.
코마에다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린 첫 날, 소우다는 감시 장치가 없다는 것을 꼼꼼하게 확인한 다음에 히나타에게 작게 속삭였었다. 해킹이라도 해서 찾아봐 줄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 매달리고 싶었지만, 히나타는 조용히 거절했다. 발각 되기라도 하면, 지금까지 77기가 기관 안에서 겨우 쌓아온 신뢰가 한 순간에 무너지게 될 것이다. 소우다 역시 가볍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소우다에게 위험한 다리를 건너게 할 수는 없었다.
“키리기리나 토가미는 철저하니까 말이야. 절대 안 알려줄 테고.”
코마에다가 다른 77기생이 있는 지부로 이전을 요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 되었지만, 확언은 할 수 없었다. 같은 지부 안에서도 정보는 숨기려면 얼마든지 숨길 수 있다. 다른 지부에 있는 동기들의 도움은 거의 받을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나나미한테 물어보면….”
“이미 내 권한 안에서 합법적인 절차로 알아낼 수는 없어. 나나미에게 그런 일을 시키고 싶지는 않아.”
“아…. 이해한다.”
소우다와 마찬가지로, 나나미 역시 소중한 동료이다. 그것은 그녀가 어떤 형태로 존재하든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히나타는 담배 연기와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커피캔을 만지작거리던 소우다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업무에 복귀해야 할 시간이다. 히나타는 손에 든 담배를 까딱여 보였다. 아직 꽤 많이 남아있었다. 소우다는 이해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흡연실 문을 나섰다.
“어쨌거나, 기운 내라. 내가 뭐 도울 수 있는 거 있으면 바로 말하고.”
“아아. 고마워.”
남은 담배를 마저 태우던 히나타는 아직 긴 담배를 중간에 비벼 꺼 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기들에게 위험한 일을 시킬 생각은 없었지만 히나타 본인은 무슨 일이라도 할 생각이 충분히 있었다. 5주 동안 충분히 고민한 결과, 히나타는 갖고 있는 수단 중에서 마지막까지 미뤄뒀던 것을 꺼내들었다. 만약 실패한다면 관련된 다른 일들에 전혀 발도 못 붙일거라는 각오는 해야 하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부상에서 나은 뒤 복귀 후 5주. 기관에 대한 체면치레는 충분히 했다. 며칠씩이나 일을 빠진다면 이번에야말로 큰일이겠지만 주말을 끼고 앞뒤로 하루씩 시간을 내는 것은 가능했다. 오늘 아침, 키무라는 복잡한 표정을 했지만, 결국은 히나타가 내민 서류를 승인해주었다. 일단 명목상으로는 타 지부의 지부장 면담 신청이었기 때문이다. 키무라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의 도움을 준 것이라, 히나타는 마음 속 깊이 감사했다.
히나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기관 내 간부 중에서 제일 마음이 약한 사람을 찾아가 도움을 청해보기로 했다. 물론 본인에게 그런 평가를 직접 말할 수는 없었다.
“사카쿠라 지부장. 4지부의 히나타 하지메의 면담 요청입니다.
“거절해.”
“안녕하세요.”
사무실 바깥과 연결된 전화기를 들고 있는 자세 그대로 문 쪽을 바라본 사카쿠라의 얼굴이 구겨졌다. 면담 허가 여부를 따지지 않고 문을 열어버린 것은 타당한 판단이었다. 허가를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물건이 날아오더라도 피할 자신은 있었지만 처음 한 방 정도는 예의상 맞아줘야겠다고 생각한 히나타는 문을 연 채 그대로 서서 인사를 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아무것도 날아오지 않았다. 물론 사카쿠라의 성격이 자애로워서는 아니다. 책상 위에 던질 만한 물건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카쿠라는 서랍을 열어서 던질만한 물건을 찾는 대신에, 훨씬 더 쓰기 편한 것을 찾은 모양이었다. 무엇일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사카쿠라의 손등에 불룩 솟은 힘줄을 본 히나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왼손으로 때리면 산재 보험 청구할겁니다, 선배.”
“누가 네 선배야?”
사카쿠라가 짜증스러운 듯이 히나타쪽으로 다가왔다. 미래 기관에 소속된 것은 사카쿠라가 먼저이고, 직위도 히나타보다 높으니 선배라는 호칭도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단어가 품고 있는 함의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사카쿠라는 잘 알고 있었다. 팔을 뻗으면 주먹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사카쿠라가 멈춰 섰다.
히나타는 손만 움직여서 등 뒤로 문을 닫았다. 히나타를 여기까지 안내한 6지부의 지부원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등 뒤로 꽂히다가 문에 막혀 사라졌다. 지부장의 성격을 알고 있을 테니, 걱정하는 것은 히나타가 아니라 그 자신일지도 모른다. 히나타는 속으로나마 작게 사과를 했다.
“면담 같은 소리 하네…. 너랑 할 이야기 없어. 나가.”
“코마에다는 입사 직후부터 계속 제 업무 파트너였습니다. 행방 정도는 알 권리가 있습니다.”
“그 정보를 네가 알게 되면 코마에다 나기토의 업무 수행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에 각하한다.”
말 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사카쿠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상대하기 싫은 사람을 앞에 두더라도 그냥 입을 닥치게 만들지언정 거짓말을 꾸며내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히나타는 의외라는 듯이 사카쿠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금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고요? 그 녀석이?”
“그래. 소규모지만, 절망의 잔당 놈들의 근거지를 찾아가서 착실하게 박살 내놓고 다니는 중이다. 너랑 다닐 때 보다 훨씬 더 빠르고 확실하게.”
“…….”
히나타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지만, 몸을 감고 있는 공기가 바뀐 것을 느꼈는지, 사카쿠라가 몸을 굳혔다.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은 기관 내에서도 탑급에 드는 사람이다. 훨씬 더 팽팽해진 공기에 사카쿠라의 눈초리가 더 험악해졌을 때, 히나타가 숨을 푹 내쉬었다.
어느 정도는 의도된 한숨 소리였다. 부탁을 하러 온 입장을 분명히 하겠다는 제스처이기도 했다. 사카쿠라는 일단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경계를 완전히 풀지는 않았지만 할 말은 해보라는 듯이, 사카쿠라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선배, 비슷한 처지의 사람끼리 서로 좀 돕고 삽시다.….”
“…하아?”
히나타는 손을 들어서 피로한 듯이 눈 사이를 문질렀다. 실제로 피로감을 느끼고 있기도 했다. 이건 왼주먹으로 때려도 맞아줘야겠다. 얼굴은 무사하기를 바라면서 히나타는 입을 열었다.
“남의 연애를 잘 되게 하면 자기 연애운도 트인다잖아요.”
“그때 진짜 서류에 싸인도 못하도록 반 죽여 놨어야 하는데.”
뻐억, 하고 명치에 와닿는 주먹은 묵직했지만, 그때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히나타도 변했고, 사카쿠라도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본과 건물 앞에서 아직 학생이던 시절의 히나타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면서 사카쿠라가 이를 갈았다. 여러모로 두 사람에게는 각별한 추억이었다.
그때는 히나타의 얼굴도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카무쿠라 이즈루에 대해서 알게 된 후로 사카쿠라가 오랫동안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히나타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불평처럼 사카쿠라가 내뱉는 말도 웃으면서 넘길 수 있었다. 주먹은 웃음이 나오지 않는 세기였지만. 그래도 오른손인 것에 고맙다고 해야 할까. 허리를 조금 앞으로 숙이고 히나타는 잠시 숨을 골랐다. 피하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을 텐데 가만히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사카쿠라는 두 번째 주먹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후우…. 그래도 비합법적인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아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건 기특하잖아.”
“말이 짧다, 새끼야. 그래서 선택한 루트가 타 지부장의 온정에 기대어 정보를 얻어내는 거냐?”
“어라…. 온정이 남아 있었습니까?”
“역시 니들은 서로 붙여놓으니까 악영향을 줘. 말투 닮은 거 봐라.”
징그러운 자식들.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사카쿠라가 몸을 돌렸다. 책상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면서도 히나타는 초조해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다. 침착한 태도가 더 짜증난다는 듯이 의자에 거칠게 앉은 사카쿠라가 안경을 꺼내어 썼다. 키판을 바쁘게 두드리기를 몇 분, 종이 한 장이 프린터에서 튀어나왔다.
“받았으면 꺼져.”
“보답으로 고백하기 좋은 데이트 장소 리스트라도 드릴까요.”
“하아…. 진짜 말로 할 때 꺼져라….”
세상의 모든 근심을 짊어지기라도 한 듯한 한숨소리가 들렸다. 히나타는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사카쿠라에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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