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우유신화/글
a monochrome film
커피우유신화
발렌타인+로우 위
커플링 요소는 없습니다. 계속 없는 것만 쓰는 기분이.......:Q 약합니다. 일단은 대놓고 그런 요소는 없어요
시기는 둘이 22,3살 때 쯤.
매끄럽게 닦인 대리석 바닥을 경쾌한 구두소리가 가로지른다. 팅,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양복을 갖춰 입은 일단의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섰다. 밝은 미소, 오고가는 인사. 사람들의 얼굴에서 그늘은 찾아 볼 수 없다. 금융가 한 가운데에서는 불황도 세련된 모습으로 머무르고 있다. 더 유능하게, 더 친절하고 성실하게 보여서 해고 대상이 되지 않으려는 몸부림들이었다. 술렁거림과 불안한 공기는 없었지만 색색깔의 컨버스화와 청바지는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어깨선이 딱 들어맞는 재킷과 윤이 나는 구두가 만들어내는, 성형 미인 같은 아름다움만이 남았다.
고마운 일이었다. 덕분에 구두닦이는 성업 중이다. 건물 로비로 딱딱한 나무가방을 어깨에 맨 청년이 들어섰다. 셔츠에 조끼는 입고 있지만 노타이에 첫 번째 단추는 풀었다. 갈색 로퍼 위로 살짝 보이는 발목이 하얗다. 청년은 익숙한 듯이 안내데스크로 다가가서 주머니에서 명찰을 꺼내 보였다. 회사와 전속 계약을 맺고 있는 구두닦이 가게의 사원증이었다. 회사원들이 구두와 의상에 신경 쓰기 시작하면서 런던 시티구역에는 구두닦이 가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구두닦이들은 골목 어귀나 노천 카페 주변으로도 모자라 회사 안까지 드나들게 되었다. 건물 밖으로 나갈 짬이 없는 회사원들에게는 좋은 일이었지만 경비원들에게는 골칫거리였다. 그래서 몇몇 회사는 아예 좀 규모가 큰 가게와 전속 계약을 맺고 정해진 시간에 구두닦이를 들여보내기도 했다.
청년은 몇 주 전부터 출근하기 시작한 구두닦이였다. 구두를 닦는 데에는 고급기술이 필요 없었지만 가게 매니저는 사람을 가려서 뽑았다. 보통은 구두를 닦을 동안 신을 슬리퍼를 내어 주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정장 스커트를 입은 여성 고객의 다리를 보면서 구두를 닦아야만 할 때도 있다. 너무 음흉하거나 고객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는 인상도 곤란하지만 너무 화려하게 잘생긴 얼굴도 곤란하다. 그런 의미에서 청년은 합격점이었다. 흐릿하고 잿빛이 섞인 금발아래 자리한 수수한 얼굴은 보는 사람에게 희미한 인상만을 남겨주었다. 편안한 분위기의 그에게 안내데스크의 직원도 밝은 미소를 건네었고, 그는 작은 목례로 답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래층 사무실들은 오전 시간에 이미 다른 직원이 방문 했을 것이다. 청년은 직원용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계약을 맺을 때, 전면 통유리로 되어서 건물 밖에서도 안이 보이는 내빈용은 사용하지 말라는 주문이 있었다. 청년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가방을 고쳐 매었다. 어차피 런던 시내의 빌딩은 지겹게 내려다봐왔다. 굳이 일하는 중에 다시금 구경하고픈 생각도 없었다. 위쪽 사무실들은 높은 층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들리는 것이 편했기 때문에 최상층에서 아래로 세 번째 버튼을 눌렀다. 기계의 웅웅거리는 소리를 말없이 듣고 있으려니 중간쯤에서 엘리베이터가 섰다. 들어선 것은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어깨가 꼿꼿한 남자였다. 기분이 안 좋은 듯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이런 시기에는 오히려 남자가 고위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증거였다. 회사 안에서 표정 관리를 할 필요가 없는 남자인 것이다. 청년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예의바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저 쪽에서 먼저 말을 걸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불쑥 들어온 목소리에 청년은 조금 놀랐다.
“몇 번 본 적 있는 얼굴이군. 구두닦이인가?”
“네, 미스터.”
긴장한 티가 역력했지만 낮은 목소리였다.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무실을 방문하면서 닦는 건가? 내 사무실에서는 본 적이 없는데.”
“저어, 34층 위로는 올라가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 그런가.”
엘리베이터 안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대화의 맥이 끊겼지만 청년은 함부로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남자는 왼손으로 턱수염을 잠시 만지더니 팔짱을 꼈다. 커프스단추가 반짝거렸다. 불편한 공기를 바꾸려는 듯, 청년이 스쳐가듯이 말했다. 필요하시다면 언제 한번, 사무실로 불러 주세요. 남자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남자가 내렸다. 힐끗 뒤를 돌아보았지만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청년과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사흘 뒤, 청년은 다시 남자와 마주쳤다. 이번에는 엘리베이터 안에 젊은 여성도 함께였다. 비서인 것 같았다. 그녀는 안경을 만지며 이상하다는 듯이 청년을 흘끔거렸다. 시선을 눈치 챘지만 청년은 먼저 말을 걸지는 않았다. 말을 아끼고 있는 건지, 긴장 한 건지 구분이 안 가는 모습이었다. 남자는 두 사람 사이의 어색한 공기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듯 한가로운 표정으로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작게 잘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차임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지만 청년이 내리기 전에 비서가 다시 닫힘 버튼을 눌렀다.
“올라가서 내 것부터 닦게.”
청년이 뭔가 묻기도 전에 남자가 말했다. 반론은 들어본 적도 없다는 말투였고, 그래서 청년도 아무런 대답 없이 조용히 서서 엘리베이터가 다시 멈추기를 기다렸다. 36층은 한 층 전체를 사무실 두 개가 차지하고 있었고 세 사람은 중앙 복도에서 왼쪽 문으로 들어갔다. 비서 업무를 보는 책상과 웨이팅 룸 뒤로 다시 육중한 나무문이 보였다. 방으로 따라 들어온 청년이 문가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남자는 곧 몸을 돌려 문을 닫았다. 찰칵 하고 잠금쇠의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윤기가 흐르는 가죽 소파에 앉았다. 잠시 바라보던 청년이 나무가방에서 펠트로 된 얇은 슬리퍼를 꺼내었다.
“슬리퍼를 드릴 테니 구두를 벗어주시겠습니까, 미스터?”
“아니, 신은 채로 부탁하지.”
청년은 의자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단정하게 내려앉았지만 결이 좋지 않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방 안의 블라인드는 닫혀있었고 형광등 아래에서 내려다보이는 머리색은 더 칙칙한 밀 빛깔이었다. 하얀 장갑을 낀 손이 남자의 왼쪽 발을 잡았다.
“그럼 왼쪽부터 실례하겠습...”
“정말 구두나 닦기 위해 사무실 안에 들인 거라 생각하지는 않지? 그 정도는 알 나이로 보이는데.”
손이 멈칫했다. 발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청년이 손끝을 움츠렸다.
“그럼 잠깐, 장갑을...”
“천천히 하게.”
면으로 된 장갑이 천천히 손에서 벗겨졌다. 하얗다기보다는 죽은 빛을 띠는 손목이 보였다. 벗은 장갑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손끝이 깨끗했다.
“구두닦이라면서 손톱이 아주 깨끗하군?”
“맨손을 보실 일이 있으실 때 불쾌하시지 않도록 관리하고 있습니다.”
남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손을 뻗어 청년의 턱을 들어 올리자 희미하게 보라색이 먹힌 회색 눈동자가 남자를 마주 올려보았다. 아이리시인가? 손을 볼로 옮기자 익숙한 듯이 손바닥에 얼굴을 기대온다. 옅게 주근깨가 얹힌 볼은 조금도 붉어지지 않은 채였다.
“이쪽이 본업인가?”
“아뇨.”
“하지만 익숙해 보이는데.”
“혀를 쓰는 건 이것보다 다른 데 더 능숙하죠. 예를 들면 대화라던가.”
20분 뒤, 나무가방을 어깨에 맨 청년이 사무실 문을 열고 나왔다. 비서는 청년의 등을 흘끗 보았지만 말을 걸지는 않았다. 복도로 나온 청년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라운드 플로어 버튼을 눌렀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로비로 내려왔지만 아무도 청년을 주의 깊게 보고 있지 않았다. 건물 밖으로 완전히 나온 청년이 가방을 다른 쪽 어깨로 바꾸어 매었을 때 뒤에서 낮게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Shoe shine boy.
“구두 닦는 데 얼마야?”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자 청바지에 가디건을 걸친 금발 청년이 서 있었다. 금융가 한 가운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차림새는 아니다.
“네가 신고 있는 건 구두가 아닌데.”
로우 위가 발렌타인의 컨버스화를 보며 말했다. 발렌타인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깝잖아. 모처럼 네가 그런 차림새까지 하고 있는데.”
“시답잖은 소리 하지 말고 주차장으로 안내해. 차 가지고 왔지?”
증권사 주차장에 세워진 새빨간 스포츠카를 본 로우 위는 한숨을 한번 내쉬었지만 군소리 없이 올라탔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시동이 걸렸다. 로우 위는 좌석을 뒤로 젖혀 몸을 느슨하게 기대었다.
“한 달 넘게 고생했지? 수고했어.”
정확하게는 43일 만이었다. 머리가 빨리 자라는 편도 아니었고, 원래 머리색도 옅었기 때문에 염색을 여러 번 할 필요는 없었지만 일부러 싸구려 질감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염색약은 처음 며칠 동안 두피와 눈을 따갑게 했다. 다음부터는 비싼 약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예산도 더 받고. 로우 위는 손을 들어 콧잔등을 문질렀다. 화장이 번지면서 주근깨가 지워졌다.
“그냥 면담 신청을 해서 3,4분 이야기하고 나오면 끝날 일이었을 텐데 말야. 쓸데없이 일들을 키운다니까?”
발렌타인이 로우 위를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도심가를 빠져나와 한산한 국도로 접어들어서 차는 속도를 계속 높이며 달리고 있었다.
“증권은 까다로운 문제야. 우유협회측도 예의주시하고 있을 테니까 우리가 뭔가 했다는 걸 알아차리면 곤란해. 그리고 속도 줄여.”
“그 동네랑은 어차피 협력관계잖아? 좀 들키면 어때. 그리고 길에 경찰 없습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
“어느 쪽?”
“둘 다.”
나무 그늘에 주차해 있던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쫒아왔다. 발렌타인은 혀를 한번 차고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젊은 경찰은 구두닦이 상자를 무릎에 올리고는 조수석에 편히 기대앉은 로우 위와 발렌타인을 잠시 번갈아보다 얼굴을 붉혔다. 말을 조금 더듬는 경찰에게서 벌금딱지를 받은 발렌타인이 다시 창문을 올렸다.
“옆 동네도 마음 탁 터놓고 못 믿는다니 꿈도 희망도 없네.”
“너 일부러 그랬지.”
“아닌데요.”
한층 속도를 줄인 차가 쭉 뻗은 길을 달렸다. 로우 위는 상자에서 장갑을 꺼내 발렌타인의 얼굴로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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