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검난무/글
[만바미카] 오월의 비 샘플
도검난무 온리전 <도를 아십니까> 에 나올 야만바기리 쿠니히로 x 미카즈키 무네치카 소설입니다.
R-18
A5 B6 50쪽 (책사양이 변경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ㅠ)
4000원 3500원
※ 무대 도검난무 '혼노지의 변' 기반, 그 이후 시점을 다루고 있습니다만, 칼스테를 보지 않았어도 읽으시는 데는 문제 없습니다.
※ 미카즈키 무네치카의 전 주인인 아시카가 요시테루와 그의 죽음에 대해서 꽤 많이 다룹니다.(실제 역사 및 인물과는 관련 없는 픽션입니다.)
※ 츠루마루 쿠니나가와 이치고 히토후리가 비중있게 등장하지만 연애적 요소는 없습니다.
※ 그 외 다른 도검 및 등장 인물들 역시 야만바기리와 미카즈키에 관련하여 상식적인 선의 호감과 동료애 이상의 연애적인 감정은 전혀 없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책 실물에는 대사부분에 줄띄움을 넣지 않습니다.)
一.
부상자가 많이 나온 전투였다. 중상 하나에 경상 셋. 멀쩡한 것은 대장과 후미를 맡은 나마즈오 토시로 뿐이었다. 출진명령을 내리는 것은 사니와지만 전장에서의 판단과 결정은 대장의 몫이다. 진군 결정을 망설이는 대장에게 저는 더 싸울 수 있다며 나선 것은 바로 부상자 그 자신이었기 때문에 원망의 눈초리는 보이지 않았다. 편의에 따라 대장직이야 정했지만 모두가 평등한 입장에서 한 마디씩 거들며 부대를 꾸려온 터다. 결과는 모두의 책임이지 어느 한 이에게만 짐 지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 검들의 당연한 생각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장직을 맡은 야만바기리 쿠니히로의 표정은 어두웠다.
타도임에도 불구하고, 야만바기리가 1부대의 대장으로서 제몫을 해내고 있다는 것에는 아무도 이견을 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야만바기리는 자신이 그 어느 때 보다 초조함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인정했다. 본성 귀환을 조금만 더 일찍 결정했더라면. 후회가 쓴 맛이 되어 입안에 감돌았다. 등에 업힌 후도의 목에서 쌕쌕거리는 숨이 새어나왔다. 걷지도 못 할 만큼 다친 후도 외에도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부대원이 많았기에 부대는 서로의 상태를 자세히 돌아볼 겨를도 없이 서둘러 혼마루로 향했다. 탐색 42일째. 미카즈키 무네치카는 아직 귀환하지 않았다.
혼마루의 시간은 제각각 간다. 도검들마다 신격을 얻어 츠쿠모가미의 영을 갖게 된 시기와 기간도 다를뿐더러, 다시금 육을 얻어 혼마루에 현현한 시기도 뒤죽박죽이기 때문이다. 세 살 먹은 어린아이와 여든 살 노인의 생각은 종족이 다르게 느껴질 만큼 차이가 나는 법이다. 하물며 헤이안 시대부터 적의 피를 먹어온 오래된 칼들과 단 몇 십 년 동안 주인과 함께 불꽃같은 생을 살아본 젊은 칼들이 체감하는 순간순간이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날 숨 대신 불티를 날리는 검들이 늙은 칼을 답답해하지도 않았고, 꽁꽁 얼린 시간을 겨우 호흡으로 녹여내고 있는 검들이 어린 칼들을 무시하지도 않았다는 것만이 사람이 사는 풍경과 다른 점이었다.
느리지만 확실히 현대에 적응하고 있는 헤이안 도검들 중에서도 미카즈키 무네치카는 유독 적응이 느린 편이었다. 제 입으로 가장 늙은 영감이라며 농을 하는데다 원래가 남의 시중이 익숙한 몸일 것인지라 다른 검들은 웃으며 수발을 들어주었다. 할아버지라 현대 문물이 좀 낯설지 않겠냐는 장난 섞인 위로도 뒤따랐다. 주로 미츠타다나 카센 등이 수발을 들어 준다고는 했지만 미카즈키가 남의 손을 빌리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천하오검의 이름에 걸맞은 활약을 하는 전장에서야 말 할 것도 없고, 밭일이나 말 당번도 다른 검들 못지않게 제 몫은 해냈다. 혼마루의 다른 식구들과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었다. 야만바기리가 근시 역을 이어받기 전에는 근시이자 1부대의 대장으로서, 그 이후에는 2부대의 대장으로 부대를 꾸려나간 것도 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카즈키는 현세의 공기를 완전히 몸에 감지 못한, 어딘가 붕 떠있는 존재였다. 다른 검들에 비해서 조금 뒤늦게 현현한 미카즈키 무네치카가 단도방 마루에 첫 걸음을 내딛는 순간, 근시였던 야만바기리는 근시업무 인계를 위해 동행했던 이치고 히토후리가 헛웃음을 웃었던 것을 기억한다. 야만바기리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것을 알아챈 이치고는 곧 표정을 숨겼지만, 그 웃음 속에 들어 있던 것은 경탄도 당황도 아닌 참담함이었다. 주인이 기다려마지않던 천하오검이 드디어 혼마루에 오게 되었는데 대체 저 표정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은 들었다. 하지만 남의 마음을 헤아릴 만큼의 여유는 없었던 터라 의문은 의문으로 남겨두고 그 일을 끝으로 야만바기리는 근시 업무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새삼 생각이 난 것은 사라진 미카즈키를 찾아내기 위한 단서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도움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부대원들이 다 수리를 받고 제 방에 들어가 쉬는 것을 확인한 야만바기리는 아와타구치의 방이 몰려있는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다행히 이치고의 방에는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이치고는 조금 놀란 표정이었지만 반갑게 야만바기리를 맞이했다.
“의외의 손님이로군요. 조금 놀랐습니다.”
“실례하지.”
일단 권하는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말주변이 없는 야만바기리가 우물거리며 말을 고르고 있는 동안 이치고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주었다.
“미카즈키공은, 아직 소식이 없으시지요?”
“아. …안 그래도 그 이야기 때문에 왔지만.”
그렇겠지요, 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이치고를 보며 조금 머쓱해졌지만, 야만바기리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2부대의 대장을 맡고 있는 이치고 히토후리는 평소와 같이 부대를 정비하는 것에 신경을 써야했기 때문에 미카즈키의 수색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하긴, 인연 있는 장소는 한 둘이 아니니까요….”
이치고가 안타까운 듯이 말을 이었다. 야만바기리가 눈썹을 찌푸렸다. 미카즈키가 사라진 지 한달이 훌쩍 넘었지만 야만바기리는 아직 갈피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11세기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그 천하오검이 거쳐 간 무장은 산처럼 많았고 인연이 있는 장소도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역사수정주의자의 손에 떨어졌는지, 제 발로 길을 나섰는지도 불투명한 상황에서 천년을 넘는 시간의 모든 장소를 다 돌아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야만바기리는 출진을 명령받은 시대를 전후로 하여 사니와에게 무리가 가지 않는 한도 내에서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해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시대의 문을 여는 데는 사니와의 영력이 필요한지라 기약 없이 아무 곳에나 힘을 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시대와 장소를 서너 개 정도로 줄일 수 있다면, 주군도 따로 시간을 내어주실 여력이 있는 듯 하더군.”
“서너 곳….”
“그래서 혹시 짐작 가는 시기가 없는가, 물어보고 싶어서.”
이치고가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려는데 야만바기리가 얼른 말했다.
“사소한 것이라도 좋아. 미카즈키에 대해서 알고 있는, 내가 모르는 이야기는 없을까?”
내가 모르는 이야기. 이 혼마루의 초기도로서 가장 오래 있었던 야만바기리지만 다른 검들과의 교류는 그리 깊지 않았기 때문에 야만바기리가 잘 모르는 이야기도 충분히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치고는 야만바기리의 말에 방점이 찍혀있는 곳을 바로 알아보았다. 아직 인간의 몸을 얻어 현현하기 전의, 츠쿠모가미로서 의식만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 이치고 히토후리가 미카즈키 무네치카와 처음 단도방에서 얼굴을 마주했을 때의 표정을, 이 타도는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그 때 미카즈키의 얼굴을 본 순간 이치고 히토후리는 한 눈에 알아보았다. 기억 속에 있는 죽은 칼의 얼굴이다. 미카즈키 무네치카의 시간은 이미 몇 백 년 전에 멈춰있었다. 그 순간을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이치고는 정확한 날짜까지도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에이로쿠 8년 5월 19일. 어떤 남자가 죽은 날이다.
사니와의 손에 의해 혼마루에 모이기 전부터 인연이 있는 칼들은 많이 있었다. 주인의 허리춤에 함께 걸려 있거나 같은 방에 보관되어 친분을 쌓은 이들은 가끔 그 시대의 전장에 나서면 추억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검의 날카로움이 아닌 다른 것에 더 가치가 실려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시절에는 한 자리에 셀 수도 없이 많은 동지가 모이던 시기도 있었다. 이치고는 오사카성에 틀어 앉아 자신들을 무작정 모아댔던 한 남자를 생각했다. 그 시절에 함께 ‘모셔져’있던 이들은 혼마루에만도 많이 있었지만 그 때를 추억으로 이야기하는 이는 딱히 없었다. 그들에게 도요토미가 유별나게 싫은 주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기억에 남을만한 일이 없었을 뿐이다. 화려한 것을 좋아했던 왜소한 남자. 그렇게 끌어 모은 화려한 것들은 저들이 내뿜는 빛에 질식하여 산 채로 박제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쇼쿠다이키리가 그러했다. 이치고의 기억 속 미츠타다는 아직 쇼쿠다이키리의 이름을 얻기 전의 미츠타다였고 얼굴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수많은 미츠타다 가운데서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미츠타다 하나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기억을 굳이 끄집어내어 되새김질 할 필요도 없었고 기껍지도 않았지만, 이치고는 기타노만도코로의 처소에 도착한 미카즈키 무네치카의 모습을 다시금 생각해보았다. 단도 방에 처음 발을 내딛던 그 얼굴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시체가 있었다. 뿌듯한 얼굴로 아내에게 천하오검에 대해 운을 떼고 있는 관백의 등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조소했던 기억이 난다. 저 치의 손을 타기 전부터 목숨을 잃은 칼이란 흔치 않다. 다행이군. 당신이 죽이지 않았어. 그러거나 말거나 죽은 칼은 침묵했고 칼을 받은 이도 더더욱 말이 없었다. 그 후로도 다시 500년. 전란과 화마를 겪어 본체가 소실된 칼들마저 사니와의 힘으로 새로운 생을 얻었지만 저 천하오검은 몸만 되살아나온 것 같았다. 최소한 이 혼마루에서 저와 다른 한 명은 확실히 알아차렸을 것이라고, 이치고 히토후리는 생각했다.
“제가 아니라, 츠루마루공에게 가셨어도 괜찮았을 텐데요.”
화가 난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아까보다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이치고가 대답했다. 기억하기 싫은 부분을 건드리게 되리라 짐작은 했던 터라 야만바기리는 새삼 미안함을 느꼈다. 하지만 츠루마루에게는 갈 수 없는 이유가 없었다.
“그쪽은 다정함이 지나쳐서.”
츠루마루도 알고 있는 것은 비슷하겠지만, 이치고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절대로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의 온도의 차이라기보다는 색깔의 차이였다. 이치고는 턱에 손을 가져다대면서 흐음, 하고 숨을 내쉬었다.
“다정함을 기대하고 오신 게 아니라면, 마음이 좀 편해집니다만 역으로 묻고 싶은 게 생겼군요.”
이치고의 입에서 자못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찾아낸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데리고 돌아올 거다.”
야만바기리가 드물게 즉답했다. 야만바기리는 희미하게 느끼고 있었다. 아마도 이치고에게 온 것은 정답 패를 뽑은 것이다. 이치고는 처음부터 미카즈키가 제 발로 나간 것이라 상정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확신에는 근거가 필요하다. 이치고는 그 근거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야만바기리가 아는 이치고 히토후리는, 상대가 다 알고 왔다면 구태어 거짓을 말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확언은 못 드립니다.”
“그걸로도 충분해.”
시체를 찾으려면, 죽은 장소를 파봐야겠지요. 이치고 히토후리가 한숨처럼 말했다. 이야기는 만나서 직접 들으라는 말도 덧붙였다. 가봐야 할 곳이 나왔다. 1565년 음력 5월 19일. 장소는 교토, 니조성.
샘플1과 샘플2는 바로 이어지는 부분이 아닙니다.
야만바기리가 미카즈키를 발견한 곳은 산노마 옆의 곁방이었다. 평상시라면 가로들이 쇼군의 어전에 나서기 전 대기를 하는 조용한 장소였을 테지만, 미요시의 군세가 한바탕 휩쓸고 간 그곳은 문짝이 뜯기고 다다미가 들떠 엉망이 되어 있었다. 하도 사람을 베어 부러져 꺾인 칼이며 창칼에 맞부딪혀 이가 나가버린 칼들이 여기저기에 어지러이 꽂혀있는 모습에 야만바기리는 가볍게 현기증을 느꼈다. 검의 묘지 같다. 피와 뭔지 모를 얼룩들로 엉망이 된 방 안과는 다른 공간인양,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깨끗한 도코노마에 미카즈키가 앉아있었다.
“미카즈키.”
다급한 마음과는 달리,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왔다. 턱에 손을 괸 채로 어디를 향하는지 모를 곳을 멍하니 보고 있던 미카즈키가 야만바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에 다시 빛이 들었다. 잔뜩 긴장했던 몸에 힘을 빼며 야만바기리가 미카즈키에게 다가갔다. 미카즈키가 입을 열었다.
“걱정이 되었느냐? 내가.”
“…그래. 당신 때문에 걱정이었지.”
역사를 본래대로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 도검남사이지만 전주인의 일에, 혹은 연이 있었던 다른 칼의 일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검들은 항상 그를 경계하고 역사의 흐름을 존중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미카즈키에게 그와 같은 번뇌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다. 만약 미카즈키가 저 역사수정주의자들과 같이 어둠으로 전락했다면. 야만바기리는 이길 자신이 없었지만 역시 직접 갈 수 밖에 없었다. 맞찔러 죽여서라도 그 걸음을 멈추게 해야 할 의무가 야만바기리에게는 있었다.
시간역행군을 재로 만든 것은 아마도 미카즈키였을 것이다. 역사의 흐름도 얽힌 곳 없이 본래대로 흘러가고는 있다. 하지만 야만바기리는 미카즈키의 목적을 알지 못한 이상은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역사를 바꾸려 했으나 실패했는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었는가. 전투태세는 풀었지만 아직 칼을 거두지는 않는 야만바기리를 보며 미카즈키가 작게 웃었다.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야만바기리의 마음에 담아둔 생각이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심중(心中)인가, 열렬한 마음에 답하지 못해 미안하다만 사양하도록 하지. 게다가 이미 늦었단다.”
이런 상황에까지 농담을 하는 천하오검의 말을 들으며 야만바기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고 진심을 내보이지 않는다. 이미 인간의 언어가 통하지 않는 시간역행군과는 달리 미카즈키는 제대로 대화가 통하고 모습도 그대로인 것을 보아서는 일단은 안심이었지만,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이미 ‘늦었다’?”
야만바기리는 빠르게 미카즈키를 훑어보았다. 변이의 징후는 없었다. 핏자국이나 눈에 띄는 상처도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문제가 생겼을지도 몰랐다. 잠시 고민하던 야만바기리는 칼을 꽂아 넣고 미카즈키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어쨌건 목적은 귀환이다. 미카즈키가 어둠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일단 혼마루로 데리고 돌아가야 한다.
“무슨 의미지? 상처가…, 아니, 다른 문제라도 있는 건가?”
“상처는 없지. 그냥 말 그대로의 의미란다.”
나는 이제 내 죽음을 보았어. 그대의 손으로 나를 죽이기는 불가능 하겠구나. 아쉽다는 듯이 웃는 미카즈키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야만바기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 천하오검은 때때로 이렇게 야만바기리에게 영문 모를 소리를 하곤 한다.
“몸의 상처는 없는 거겠지.”
야만바기리가 재차 물었다. 이제 막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자에게 하기에는 거칠고 촌스럽기까지 한 질문이지만 미카즈키는 싫지 않았다. 그래.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팔을 잡아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기세에 끌려 일어나기는 했지만, 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놔주련.”
“늘 하는 선문답이라면 혼마루로 돌아간 다음에 들어주겠어. 주군이 문을 열어둘 수 있는 시간도 무한대는 아냐. 돌아간다.”
미카즈키는 시간을 가늠해보았다. 전투의 흔적이 묻어났지만 야만바기리가 지친 기색은 없었다. 에이로쿠로 온 지 몇 시간 되지 않아 바로 미카즈키를 찾아낸 것 같았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 있는지 모를 이를 찾으러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아마 짐작이 가는 장소마다 짧게 머무르며 기척을 감지해보고는 빨리 본진으로 귀환하는 방식을 계속했을 것이다.
여느 때 나가는 원정이며 출진에서는 도검남사들이 오가는 그 순간만 문을 여닫을 뿐, 이처럼 몇 시간이고 계속 열어두는 일도 좀처럼 없었다. 이러한 일이 몇 번이나 이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카즈키가 혼마루를 떠난지도 이미 40일이 넘었다. 그렇다면 사니와의 피로도 상당할 터, 며칠이고 문을 계속 열어두고 있을 수는 없다. 길어야 한나절. 그 후에는 다시 문을 닫고 짧게나마 신력을 회복시켜야 한다.
야만바기리로서는 사니와가 더 고생스럽지 않도록 문이 닫히기 전 얼른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었고, 미카즈키도 거기에는 동의했다. 단, 부분적으로만 동의했다. 흠, 하고 웃음 비슷한 소리가 들린 순간 야만바기리가 재빨리 미카즈키의 팔을 놓았다. 덕분에 가까스로 칼날을 막을 수 있었다.
“오오, 성장했구나.”
칭찬에도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당연할 것이다. 무겁게 내리누르는 칼날을 뿌리치며 야만바기리는 뒤로 크게 한 걸음 물러났다.
“이 망할 영감!”
도종의 차이나 연련의 시간이 승부의 모든 것을 결정짓지는 않는다. 혼마루에서 몇 번 연련을 함께 하기도 했고, 예전에 있었던 홍백전에서도 각 조의 대장으로서 진검승부에 필적하게 검을 맞대기도 했었다. 새삼 두렵지는 않았지만 분노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야만바기리는 숨을 고르며 칼끝을 바로 했다.
“무슨 짓이야?!”
“시체를 이고지고 가 봤자 주인에게도 폐가 아니냐. 혼자서 돌아가렴.”
“헛소리를 하고 싶다면 주군에게 직접 해.”
“했단다, 직접.”
야만바기리는 상단으로 치고 들어오는 검 끝을 한순간 막지 못할 뻔 했다. 간신히 흘려보낸 뒤로 한 걸음 물러나자마자 미카즈키가 몰아치듯이 칼을 찔러들어왔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도신이 서로 맞부딪혔다.
“당연하지 않으냐. 내가 문을 열 수 있을 턱이 없지.”
사니와는 표정이 별로 없는 이었지만, 미카즈키가 말을 꺼냈을 때는 드물게 놀란 표정을 했다. 하지만 말을 나누는 일은 적었어도 제 혼마루에 있는 검들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고 있었을 터였다. 그래서인지 사니와는 별다른 질문 없이, 그리고 행선지를 묻지도 않고 미카즈키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확인이 필요하다면, 가서 해보라. 미카즈키는 그 때의 대화를 떠올렸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사니와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돌아오라는 당부도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렇다면 왜 당신을 찾기 위해 나를 보냈겠나!”
“나에게 기회를 준 것처럼, 그대에게도 기회를 주는 것이 공정하다 생각했겠지.”
혹여 나를 찾으라는 명령이 없었는데, 그대가 먼저 요청한 것 아닌가? 이어지는 질문에 야만바기리의 혀가 얼어붙었다. 미카즈키의 말대로였다. 야만바기리는 사니와의 입에서 미카즈키를 찾으라는 명령을 들은 기억이 없었다. 미카즈키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은 야만바기리가 수색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자, 그럼 다녀오라고 문을 열어주었을 뿐이다.
“기회…. 무슨, 기회?”
“나를 살리거나 죽일 기회. 하지만 말했잖니. 늦었구나.”
야만바기리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순간 밀리는 힘에 미카즈키가 검을 크게 휘둘러 피했다. 검을 섞는 통에 어느새 문을 등지고 선 미카즈키 뒤로 어두운 복도가 보였다. 반쯤 뜯긴 장지문을 발로 걷어차며 야만바기리가 검을 휘둘렀다. 미카즈키의 어깨 근처에서 튕겨나듯이 막힌 검을 다시 당기며 야만바기리는 팔에 감기는 천을 떨쳐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멋대로 포기하고. 늙은이 응석을 받아주기나 하고!”
으르렁거리듯이 터져 나온 분노의 말에 미카즈키는 씁쓸한 듯이 웃었다. 포기했다니, 츠루마루가 들으면 서운해 하겠구나. 하지만 그 다정함에 기대어 제 마음대로 했다는 자각은 있었으므로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고맙고 미안하지만 이미 너무 오랫동안 지쳐버렸다.
“이미 멈추지 않았느냐. 내 시계를 강제로 움직이지 마라.”
“나는 당신을 데리고 돌아 갈 거야.”
“시체에게 시간이 흐르면 썩고 사라질 뿐이다.”
“나는, 당신을, 데리고, 돌아 갈 거야.”
씹어뱉듯이 말하며 야만바기리가 달려들었다. 광대뼈에서 불과 한 뼘 떨어진 곳으로 칼날이 지나가며 머리카락 몇 올이 잘렸다. 미카즈키는 기세가 지나쳐 창턱에 거의 박힐 뻔 한 칼을 휘수하는 야만바기리의 왼쪽 어깨를 노리고 칼을 휘둘러보았지만 야만바기리가 보지도 않고 휘두른 검집에 막혀 뒤로 물러났다. 여유 있게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서로 다시 검을 다잡고 거리를 벌렸다. 야만바기리가 가슴께로 검을 들어 올리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주군이 미카즈키 무네치카에게 비춘 마음이, 당신을 만들었다고 했잖아. 우리들 츠쿠모가미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 것은 당신이었어. 그건 거짓말이었나?”
야만바기리는 검을 찌르듯이 내뻗어 말없이 하단을 겨냥하고 선 미카즈키의 오른쪽 팔뚝을 가리켰다. 어느새 상처가 생겼는지 찢어진 옷에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미카즈키의 시선 역시 상처에 가 닿았다가 다시 야만바기리의 얼굴로 돌아왔다.
“몸이 있고, 이렇게 피가 흐르고 있잖아. 누구 마음대로 죽었다는 거야!”
“그래, 주인의 마음이 닿아 우리에게 육신이 주어졌지. 하지만 혼은 그저 육이 존재한다는 것 만으로는 이승에 머물 수 없단다.”
단단히 붙잡아줄 닻이 필요하지. 미카즈키가 일순 시선을 발 아래로 내렸다. 미카즈키는 이미 반천년이 넘게 흐른 그 때의 일을 다시 떠올렸다. 미카즈키에게는 과거의 일이자,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재의 일이기도 했다.
그날, 그리고 오늘. 밀려오는 칼날의 물결 속에서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미카즈키 무네치카도 뽑아들었다. 손에 잡히는 것이 태도건 협차건 상관없었을 것이다. 요시테루를 만나기 아주 오래전부터 신역에 들어가 있었지만, 미카즈키가 그때만큼 치열하게 생을 실감한 적은 없었다. 미카즈키는 그날 요시테루가 휘두른 마지막 검은 아니었지만, 단 몇합 밖에는 함께하지 못했다. 검자루에 닿았던 단단한 손이 떠나간 순간을 미카즈키는 아주 오래 기억했다. 좀 더 오래 그 손에 닿을 수 있었다면. 역사의 흐름은 바꿀 수 없지만, 바뀌지 않아야 하지만. 이 몸에, 칼날 가득히, 그 죽음을 새길 수 있었다면. 그때 잃어버린 온기를 미카즈키는 아직도 되찾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손대지 않았다. 이미 완결된 이야기에 가필은 용서되지 않는다. 요시테루야.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미카즈키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야만바기리가 달려들었다. 검 등이 미간에 닿을 만큼 가까이서 검을 팽팽하게 맞대는 통에 숨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지금의 당신에게는, 닻이 없었나.”
“혼마루의 모두에게는 고맙고 미안하지. 착한 아이들이고 좋은 동료들이야.”
“혼마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야! 나는 당신에게 태양이 되지 못했나? 내 빛은 당신을 비출 수 없었던 건가?”
미카즈키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하지만 맞댄 검에서 힘이 빠져나가지는 않았다. 야만바기리는 검 너머로 미카즈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까이 있는데도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미카즈키, 나는.”
야만바기리가 다시 입을 연 순간 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완매 감사합니다!
통판 예정은 없으며 다음 행사때 재판을 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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